많은 게임들이 나라별, 대륙별 유구한 역사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도 땅은 좁지만 수많은 신화와 민담,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중국 삼국지나 북유럽, 그리스 신화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민담과 전설이 많이 있죠. 인벤에서는 한국 신화의 게임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며 지역별 설화를 소개해 드리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지역 : 수원시(Suwon City) 현황 : 면적: 121.03㎢ / 인구: 1,191,620명 설명 : 수원은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특례시이자 경기도 최대 도시다. 수원은 선사시대부터 물이 많은 지역이라는 뜻을 담아 ‘모수’, ‘매홀’, ‘수성’, ‘수주’ 등으로 불렸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
[수원시 지역 설화] # 수원은 그 뿌리를 찾기 위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고장이며,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 흔적들은 역사로 드러나는 것부터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는 것까지 정말 다양하죠. 수원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보존하고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수원문화원’을 발족하고, 관련자료들을 모아 누구나 편하게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약 마흔 가지에 달하는 설화 중, 게임 미디어와 결합하여 더 흥미로운 전개를 만들어볼 수 있는 것들을 골라보았습니다. 대부분 원문 그대로 담았지만, 한자나 지금은 쓰지 않은 사어(死語)가 많아 읽기 편하게 조금 편집, 각색해서 정리했으며 일부 삽화는 그림 AI(midjourney)를 통해 만들었습니다.
‘효심 증명한 능참봉, 세끼 닭을 하사 받다’
● 수원의 능참봉 이야기
● 지역: 경기 화성시 안녕동 효행로
수원에서 전해져 오는 설화들을 돌아보면, 대부분 사람들의 효심을 기리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과장을 더하면 효와 관련된 이야기가 구전되는 설화 중 과반을 차지할 정도다. 그만큼 수원이 효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고장이라는 이야기인데, 이와 관련하여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바로 ‘수원 능참봉은 한 끼에 닭이 한 마리’라는 이야기다.
수원 근처에 ‘병점’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영남과 호남 지방의 사람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다가 수원에는 미치지 못하고, 휴식을 위해 잠시 거치게 되는 마을이었다. 먼 길을 오느라 허기진 선비들이 간식으로 먹을 떡을 파는 거리가 형성되어 ‘떡 병(餠)’자와 ‘가게 점(店)’자를 더해 병점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사도세자의 능이 있고 한 능참봉이 이 능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하루는 용한 점쟁이가 이 주변을 지나가다가 능참봉의 관상을 봐주게 됐다. 점쟁이는 심각한 얼굴로 능참봉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당신은 사흘 안에 죽는다”고 하는 것이다.
깜짝 놀란 능참봉은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살 도리가 없는가?”라며 점쟁이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점쟁이는 정말 자신이 이르는 대로 할 수 있겠느냐며 재차 물은 뒤, “사흘 뒤 저녁을 먹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나랏님 산소의 상돌 밑창에 가서 무조건 엎드려 있으라. 그래야 살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헛소리라며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정말 사흘 뒤 저녁을 먹고 나니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능참봉은 정신이 번쩍 들어 점쟁이가 말한대로 융릉에 달려 가서는 상돌 아래에 넙적 엎드려 있었다.
그 때 정조가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보고는 비 내리는 곳에 누워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자식된 도리가 아닌듯하여, “수원의 능참봉에게 네 끼에 닭 한 마리를 주며 아버님 산소를 잘 돌보도록 하였는데, 아마 이놈이 뜨뜻한 방에서 잠만 자고 있을 것이니, 자객을 보내 방에서 자고 있거든 무조건 모가지를 잘라 오너라”라고 명했다.
자객이 그 길로 내달려 능참봉의 집에 도착하니, 집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혹 능을 지키고 있는가 해서 가보니 상돌 아래에 넢적 엎드려있는 능참봉이 보이는 것 아닌가. 이 사실을 정조에게 고하니,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수원의 능참봉에게 닭을 한 끼에 한 마리 씩 줄 것을 명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닭이 네 끼에 한 마리든, 한 끼에 한 마리든 마릿수가 아니다. 그만큼 수원에서는 능참봉에 대한 대우가 좋았음을 일컫는 이야기이며, ‘수원하면 정조, 정조 하면 효’라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신묘한 기운을 가진 설화 속 동물들’
● 청명산과 신이한 짐승들
● 지역: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 청명산 인근
수원시 영통구에 위치한 ‘청명산’은 영덕, 하갈, 영통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191.9m의 산으로 황골 동쪽에 있다. 사방 삽사십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곳이기에 청명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군인들이 천명(天命)을 이어가는 산이라고 해서 천명산으로도 불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청명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명산에는 몇몇 신이한 짐승들이 살고 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세 동물이 있으니 바로 닭과 여우, 뱀이다.
청명산의 신이한 닭은 ‘환계술 닭’이라고 불리며, 청명산 밑자락에 살고 있다는 토박이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환계술 닭이 울어야 마을이 번창한다는 것이다.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일본인들의 침략 이후에 환계술 닭이 울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만 이어지고 있다.
청명산의 또 다른 신이한 동물은 흰색 꼬리를 가지고 있지만, 몸뚱이가 송아지만 한 거대한 여우다. 그 커다란 풍채에도 여간 눈에 띄질 않아 일본인 사냥꾼들이 아무리 찾아다녀도 결국 만날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외에 백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청명산의 백사는 똬리를 틀었을 때 한 마리의 토끼처럼 보일 정도로 큰 몸집을 가지고 있는데, 여간 빠른 것이 아니다 보니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주 잽싸게 움직여 쫓아버린 듯하면 어느 순간 정면에 나타나 긴 혀를 날름거렸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어떠한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세 마리의 신이한 동물들 이야기는 모두 ‘청명산’이라는 장소에 신기한 기운이 있고, 독특한 비밀이 남아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도 청명산 어딘가에는 설화 속 동물들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천년 묵은 용, 소녀를 잊지 못하고 바위가 되다’
● 용두암이 된 천년 묵은 용
● 지역: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방화수류정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는 수원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있다. 주변감시와 지휘 등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섞어서 18세기의 뛰어난 건축기술을 활용하여 지은 것이 특징이다.
방화수류정 밖에는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에는 천년 가까이 도를 닦으며 살았다는 ‘용’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이 용은 조금만 더 수행을 하며 견디면 하늘로 올라가 천룡이 될 용이었다. 용은 어느 날 부모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연못에 찾아온 한 명의 소녀를 발견했고, 그의 사정을 알고는 가엽게 여겨 잉어를 선물로 잡아주게 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 소녀는 매일같이 연못을 방문하게 되었고, 하루가 달리 성장하는 소녀를 보곤 용 역시 그녀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게 된다.
또 다른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연못에 찾아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소녀의 뒤로 한 명의 불한당이 나타나 소녀를 잡아챘다. 크게 진노한 용은 기절해버린 소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불한당에게 불을 뿜어내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용은 소녀가 매일같이 연못에 찾아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소녀에게 ‘다시는 연못에 홀로 찾아오지 말라’는 서신을 남기게 된다.
이후 소녀의 발길은 끊겼고, 얼마 후 용은 소녀가 먼 지역으로 시집을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용이 시름에 잠기자, 한동안 수원 근방에는 비가 그치질 않았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옥황상제가 용연의 용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용은 “단 하루만 사람이 되어 소녀를 만날 수 있다면 비를 멈추고, 이후 하늘에 올라가서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며 옥황상제에게 간청했다.
옥황상제는 며칠만 참으면 승천해서 천룡이 될 터인데 어찌하여 그러냐며 용을 타박하면서도, 그 간청을 들어주면서 “단 하루만 사람이 될 수 있고, 돌아올 때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소녀의 눈을 쳐다보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며 거듭 당부했다.
이후 사람이 된 용은 소녀를 찾아가 ‘내가 연못에서 당신을 도운 이’라며 자신의 정체를 전했고, 소녀는 시집을 가기 전에 은인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며 고마워했다. 둘은 밤이 새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이윽고 용이 승천할 날이 되었다. 천둥 번개가 내려치는 하늘 위로 온 힘을 다해 오르던 용은 문득 혼례를 올리는 소녀의 모습이 궁금해져 지상을 내려다보았고, 천둥과 벼락이 내려치는 하늘에 무슨 일이 있나 생각했던 소녀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마치 운명처럼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하늘로 오르던 용은 맥없이 땅으로 뚝 떨어져 돌이 되었다.
이때 땅에 떨어져 굳어진 용의 몸은 용연 옆으로 떨어져 내려 언덕이 되었고, 머리 부분은 바위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용두암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위에 현재의 방화수류정이 세워지게 됐다고 한다. 이 설화를 기억하는 이들은 지금도 용의 머리 위에 지은 집이라는 뜻을 담아, 방화수류정을 ‘용두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괴담을 부르는 고목과 이무기’
● 신풍초등학교와 고목
● 지역: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수원시 팔달구의 신풍동에 위치했던 ‘신풍초등학교’는 학교괴담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괴담이 남아있는 장소다. 수백 년을 두고 자란 잣나무 고목을 베어버리자 그 속에서 이무기가 튀어나왔고, 그 이무기를 죽였더니 그 이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괴담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다양한 악재가 겹치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 전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운동장에서 놀다가 다치게 되어도 항상 꼬리표처럼 뒤따르며 언급됐다.
선조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고목은 순조가 아버지 정조 임금의 사당으로 지은 화령전 뒤에 심어진 나무였다고 한다. 실제로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시기도 했던 신성한 사당 뒤의 고목을 마음대로 베어버렸으니, 이것이 화를 불러와 ‘신풍괴담’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풍초등학교는 수원군 공립소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뒤 120년의 역사를 가지고 3만 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이후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여러 사고들이 끊임 없이 이어진 것은 차치하더라도, 화성행궁을 복원하는 사업 중에 부지를 철거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신풍초등학교는 신풍동에 있어야 한다는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반발이 일었지만 결국 신풍초등학교는 광교신도시 쪽으로 부지를 옮겨 그 이름을 유지하게 됐다. 원래 신풍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의 건물들은 구 강당을 제외하고 전부 철거되었으나, 고목이 잘린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괴담들 역시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됐다.
‘청나라 황제도 고개를 끄덕인 대황(大皇)급 외교술’
● 대황교와 함께 증명된 조선의 외교술
● 지역: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에는 ‘대황교(大皇橋)’라 불리는 다리가 있었다.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소인 융릉으로 행차할 때 건넜던 다리다.
당시엔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여겨 얕잡아 보고 사소한 일까지도 간섭을 하였는데, 조선에 있는 다리의 이름이 클 대자와 임금 황자를 사용한 대황교인 것을 보고 “감히 조선이 황제국인 중국에서나 쓰는 글자를 썼다”며 불쾌해했다. 곧바로 이를 질책하기 위해 조선의 사신 하나를 청나라로 보내라고 명했고, 조선에서는 적임자를 뽑아 청나라로 사신을 보내게 된다.
조선에서 청나라로 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육로로 가든 바닷길을 이용하던 마찬가지였는데, 이윽고 사신이 청나라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황제의 어머니가 상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사신은 오랜 여정에도 불구하고 먼저 조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상복을 차려입은 뒤 예의를 갖추어 상주인 황제에게 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때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조선에서 떠나온 지 한 달이 넘어서 도착한 사신인데도 도착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조문을 왔기 때문이다. 황제는 미리 상복까지 준비를 해와서 예의를 갖추어 조문을 해준 사신이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다리의 이름을 대황교라고 한 것에 대해 질책을 하기 위해 불렀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결국 청나라 황제는 조선의 사신을 잘 대접한 뒤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그 이후에도 대황교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신의 놀라운 기지가 대황교라는 명칭을 지켜낸 셈이다.
인물
● 김준룡 장군 (본관은 원주(原州), 1586 ~ 1642)
● 지역: 수원 광교산
김준룡(金俊龍)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전라도 지역의 병마절도사로 재임한 인물이다. 여기서 ‘병마절도사’란 조선시대에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외관직 무관을 뜻하며, 지방군에서는 이 병마절도사가 최고위 지휘관으로 통했다.
김준룡 장군은 직접 관할하는 용감한 군사들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에 방진(方陣)을 쳤고, 이로써 사면에서 밖을 향해 공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남한 산성을 공격하던 적들은 불과 30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 광교산을 날마다 공격해 왔지만, 좀처럼 광교산을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바로 김준룡 장군의 방진이 버티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준룡 장군은 광교산 전투에서 청 태종의 사위인 ‘백양고라’와 3명의 장수, 그리고 수 많은 적병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치열했던 이때의 전투로 인해 광교산 골짜기 전체가 병사들이 흘린 피로 빨갛게 뒤덮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광교산에는 ‘오랑캐가 항복한 골짜리’라는 뜻의 호항골(胡降谷)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김준룡 장군이 전한 승전보는 1637년 1월 5일 실록자료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던 이들이게 커다란 위안이 되어주었다고 전해진다.
호항골은 병자호란 당시의 최대 격전지였으며, 최대의 전승지였으나 지금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광교산을 오르는 이들이 더 많다. 기념비의 마멸 역시 심해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므로, 항상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환기할 필요가 있다.
● 우하영 – 수원 농업을 개척한 실학자 (본관은 단양, 1741 ~ 1812)
● 지역: 경기도 수원
우하영(禹夏永)은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로, 벼슬을 하지 않아도 나라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일찍이 증명한 수원 농업의 개척자다. 젊은 시절 벼슬의 꿈을 단념한 그는 전국을 돌면서 견문을 넓혔고, 스스로 농사에 종사하면서 시골 유생으로 평생을 보낸 대표적인 ‘농촌지식인’이었다.
전국을 유랑하며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김정호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으나, 사실 수원의 인재 우하영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는 직접 전국 각 지역의 실태를 관찰 조사하고,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 풍기의 강함과 부드러움, 병과 농의 관계 등을 깊이 연구한 인물이다. 특히 당시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빈민의 생활방책을 제시할 수 있는 개혁적인 경세학을 자신의 학문적 목표로 인식하는 인물이었다.
우하영은 평생 벼슬을 한 적은 없으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농가총람’과 ‘관수만록’, ‘천일록’ 등 농업과 관련된 다양한 서적들을 남겼다. ‘농가총람’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것들을 내용으로 한 농업 책이며, ‘관수만록(觀水漫錄)’은 정조 대왕께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건설한 수원을 신흥 도시로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천일록(千一錄)’에는 농업을 비롯하여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기록들이 담겨 있다.
● 최루백 – 효심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하늘이 내린 효자
● 지역: 수원 홍법산 인근
최루백은 수원 최씨 시조 최상저의 아들로, 고려 시대 문신이다. 조선 세종 14년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최루백의 효행과 관련된 언급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오륜행실도 및 여러 책에 그의 효심이 언급되고 있다.
최루백의 나이가 열 다섯일 때, 아버지 최상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변을 당하고 만다. 평소 하늘처럼 믿고 따르던 아버지의 변고를 들은 최루백은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어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겠는가”라며 원수인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뼈를 찾아오겠다고 다짐한다.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산에 오른 최루백은 아버지의 원수인 호랑이와 마주하게 되는데,
“네가 나의 부친을 잡아먹었으니, 나도 마땅히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최루백의 말을 들은 호랑이가 사죄라도 하려는 듯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자, 최루백은 손에 들고 있던 도끼로 머리를 내리쳐 일격에 호랑이를 죽였다. 그리곤 호랑이의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수습하여 홍법산에서 장사를 지내고, 아버지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 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무덤 곁을 지키던 최루백의 꿈속에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시를 읊으며 말하길, “가시덤불 숲을 헤치고 효자 여막 당도하니 넘치는 정에 느끼는 눈물 다함이 없구나. 날마다 흙을 져서 무덤에 덮으니 마음을 알아줄 이는 밝은 달과 바람뿐이로구나. 살아서 잘 봉양하고 죽고 나선 지켜 주니 그 누가 효에 처음과 마침이 없다 말하랴” 하였다.
후에 최루백의 효심을 전해 들은 세종대왕이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는 글을 내렸고, 숙종때는 그를 기리는 효자비가 세워졌다. 최루백이 호랑이의 머리를 내리친 장소에 있는 바위는 훗날 ‘효암’이라고 불리게 됐으며, 분천리에서는 최루백의 효자비각을 찾아볼 수 있다.
아이템
● 무예제보 – 국내 최초의 무예 지침서
● 소재지: 수원화성박물관
무예제보는 국가 지정 문화제인 조선시대의 보물로, 문인 관료인 한교가 선조의 명을 받아 1598년에 편찬한 무예 기술 지침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무예서 중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며, 국내 유일본이기도 하다. 선조의 명을 받은 한교는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대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장도의 여섯 병기를 사용하는 무예에 대해 한문으로 설명하고, 한글 번역문인 언해를 덧붙였다.
무예제보는 우리나라 무예서의 원류가 되는 책이며, 이후 무예제보를 토대로 하여 ‘무예제보번역속집(1610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한 ‘무예도보통지(1790년)’가 간행되었다. 후대 무예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며, 희귀성과 더불어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지난 2021년 12월에 보물로 지정됐다.
● 지지대비
● 소재지: 수원 장안구 이목동 산
지지대비는 조선 제 22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1807년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기념비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를 하러 갈 때, 아버지의 묘가 내려다보이는 데도 묘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더디게 느껴져 ‘왜 이리 더딘가’하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아버지의 묘가 보이지 않아, 그리워하는 마음에 안타까워하며 이 고개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참 지체하였다고 한다.
정조대왕이 항상 능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항상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 지(遲)’ 두 자를 붙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56cm, 너비 56cm, 두께 33cm 크기의 비신이 있으며 위로는 집모양의 옥개석을 올렸다.
● 수원 갈비
● 소재지: 수원 우시장 일대
역사적 배경이 깔린 특수한 아이템을 소개하는데 무슨 ‘갈비’가 튀어나오나 싶겠지만, 수원과 갈비의 인연은 조선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원의 우시장은 조선 후기 이래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었으며, 장날이면 각지에서 모여든 소장수와 농민들로 언제나 성시를 이루었고, 1년간의 소 거래량은 2만 두 이상에 달할 정도였다.
우시장이 유명하게 된 배경에는 수원이 지방으로부터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인 것은 물론, 정조의 새 도시 육성책과도 관계가 있다. 수원 화성을 축성한 정조는 수원을 자립 기반을 갖춘 도시로 육성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둔전(屯田)’을 경영하게 된다. 둔전에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농민들에게 종자와 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수확기가 되면 수확의 절반, 그리고 소는 잘 키워 3년에 한 마리씩 갚도록 했다. 이에 점차 늘어난 소를 팔기 위한 장소가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의 집산과 거래 활성화는 수원을 ‘갈비의 고장’으로 이름나게 했다. 재료로 쓸 한우 갈비를 구하기 쉬웠기에 다양한 조리 방법도 생겨났는데, 갈비를 양념에 넣고 무쳐서 재어 놓는 ‘한우양념갈비’가 널리 퍼지게 된 것도 바로 수원이 시작이었다. 수원은 갈비의 고장으로 전국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됐고, 1985년 4월부터 ‘수원갈비’를 수원시 고유 향토 음식으로 지정하고 맛과 질을 향상시켜 수원갈비 전승에 노력하고 있다.
● 팔달문 동종
●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팔달문 동종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유물로, 높이 1.23m 구경 75㎝의 거대한 종이다. 1080년에 개성에서 만들어졌고, 1687년 3월에 경기도 수원부 만의사 대종으로 새로이 주조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에 사세가 기울면서 여러 보물들이 수원화성과 인근 사찰로 흩어지게 됐는데, 만의사 동종은 수원화성 건설 시에 이전되었다가 근대에 이르러 팔달문 쪽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수원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대종의 역할을 위해 다시금 주조된 이후에도 약 3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나, 종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장식들의 모습이 여전히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 이 유물의 특징이다. 이 종은 쌍룡이 새겨진 종을 거는 고리인 ‘용뉴(龍鈕)’를 갖춘 외래적인 유형에 속한다. 종신 상단에는 범자가 양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유곽과 보살 입상이, 종신 중단에는 동종에 관한 내력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하대에는 보상당초문이 새겨져있다.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있는 상단부의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
● 소재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
수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유물 중 하나로 ‘마애삼존불’이 있다. 본존 여래좌상과 좌우협시 보살입상으로 구성된 부조형 유물이며, 본존상의 높이는 113cm, 좌우 보살의 높이는 92cm다. 원래 수원시 화서동에 있던 것을 현재 수원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
중앙의 본존상 머리 뒤쪽에는 원형의 두광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불신 곳곳에는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큼지막한 이목구비에서는 마치 미소를 머금은 듯한 원만한 인상을 찾아볼 수 있다. 과감하게 생략된 옷주름과 소박한 형태의 연화대좌 표현, 세부적인 조각 수법으로 비추어보아 제작 시기는 고려 중기 이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서동 마애삼존불의 기존 명칭은 ‘동래정씨 약사불’이었다. 화서동에 있을 당시에는 마을 주민들이 불상 앞에 모여서 무병과 건강을 빌며 이를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로 섬기고 있었고, 마을 공동체의 신앙으로 자리잡으며 향토 유적으로 지정, ‘동래정씨 약사불’이라는 정식 명칭이 생기게 됐다.
이후 동래정씨 약사불을 모시던 절집이 화서동 도시재개발과 함께 사라졌고, 해당 유물만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져 관리를 받게 됐는데, 이때 ‘약사불이 아니다’라는 민원이 제기된다. 본래 약사불 본존상의 손에 쥐어져있어야할 약상자가 동래정씨 약사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민원 이후 불상 전문가들의 연구가 진행됐고, 결국 동래정씨 약사불은 약사불이 아니라는 최종 발표가 나오게 된다.
결국 수원시 향토유적보호위원회는 근거가 없는 약사불이라는 명칭을 빼고, 불상이 발견된 지역의 명칭을 넣는 일반적인 문화재 명명 기준에 따라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이라는 새로운 학술적 명칭을 붙여주게 됐다.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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