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게임들이 나라별, 대륙별 유구한 역사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도 땅은 좁지만 수많은 신화와 민담,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중국 삼국지나 북유럽, 그리스 신화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민담과 전설이 많은 나라죠. 인벤에서는 한국 신화의 게임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며 지역별 설화를 소개해 드리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지역 : 남양주(Namyangju)
현황 : 면적: 458.1㎢ (경기 전체의 4.5%) / 인구: 총 304,416세대/735,649명(23.3)
설명 : 남양주시는 본래 1980년 양주(楊州)에서 분리되었다.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인 936년(태조 19)으로, 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양주라는 명칭이 지방 행정구역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온다. 그러나 당시의 양주라는 명칭은 지금의 남양주시 영역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양주라는 명칭과 영역이 일치하는 시기는 1410년(태종 10) 양주목으로 승격되고부터다. 그러나 이때에도 지금의 진접·진건지역은 풍양현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풍양현 지역이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등장하지 않아 보아 풍양현 자체는 이즈음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이 새로 설치되었고, 1995년 1월 1일 미금시와 남양주군을 통합하여 남양주시가 되었다.
[남양주 지역 설화] #남양주시는 서울과 가까워, 지명유래담 및 이인설화등에서는 조선왕실과 관계된 설화가 많이 전해집니다. 예를 들어 팔야리의 지명 유래담은 조선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화이며, 세조와 얽혀있는 운길산 수종사, 현 광릉 앞 살내벌에 대한 이야기 및 왕숙천등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설화들이 한 자리에 잘 정리되지는 않고, 지역별로 나뉘어 구전으로 전승되는 편입니다.
또한 남양주시의 설화 및 전설들은 지역명에 대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라 설화 자체를 재구성하거나 모티브로 삼는 정도로 활용하기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지명이라 할지라도 다른 설화로 소개되거나 여러가지 설화들이 뒤섞여있기도 한 부분이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고요. 추가로 쓰지 않는 사어나 표현은 읽기 편하게 편집과 각색을 하여 정리했고, 여러 설화 중 하나만 채택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일부 삽화는 그림 AI를 통해 제작하였습니다.
‘왕도 절하게 한 신비롭고 청아한 종소리’
● 수종사 창건의 설화
●지역: 남양주시 진건면(읍)지대의 설화
조선시대 세조가 강원도에 위치한 오대산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해질 무렵 양수리에 도착하였다. 세조의 행차가 한양까지 백리 길을 앞두고 있어서 하루 저녁 묵어갈 행궁을 양수리에 마련하였다.
세조는 속리산을 비롯해서 오대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명산대찰들을 찾아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조가 잠자리에 들고 잠시 시간이 흘렀다. 세조가 갑자기 일어났다. 잠자리에서 청아한 종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종소리가 청아하구나. 듣기에 참으로 좋은 종소리구나! 행궁 근처에 큰 사찰이 있음에 분명한데, 어찌하여 대신들은 사찰이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라고 의아해 하였다.
세조가 듣기에 종소리가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종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세조는 “이 근처에 큰 절이 있는듯한데 어떤 절이더냐?”라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하, 이곳 인근에 종소리가 틀릴만한 절은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헛것을 들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라면 대신들에게 강 건너를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행궁을 떠난 대신들이 한 나절이 지나서 돌아왔다. 그리고는 세조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강 건너에 있는 산은 운길산이고, 산 정상 가까이에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굴 앞에 절터의 흔적은 있으니, 이미 폐허가 되어 사찰의 모습은 없고, 동굴 안에 열여덟 분의 나한님들이 가지런히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대신들이 군사를 데리고 동굴 앞에 이르니 십팔나한상(十八羅漢像) 앞쪽의 천정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큰절에서 듣는 아름다운 범종소리와 흡사하다는 보고였다.
세조는 “바로 그곳이다. 그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음이니, 분명 나한님들의 조화일 것이다. 내 그곳에 참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길을 잡도록 하라”고 대신들에게 말을 하였다. 동굴 앞에 도착한 세조는 동굴 안에 있는 나한의 모습을 보고, 신묘한 조화로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그 신력(神力)에 감복하며 경건하게 절을 올렸다.
세조는 “이곳이 절터이나 지난날 절이 피폐하여 나한님들이 당(堂)을 잃고 동굴에 드신 것이 안타깝도다. 아마 짐의 귀에 들린 종소리는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나한님들의 계시가 분명하다. 속히 의논하여 이곳에 절을 지으라. 그리고 절 이름은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 뜻을 새겨 수종사라 함이 좋은 듯하다.”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궁궐로 돌아갔다고 한다.
‘악독한 구렁이의 복수를 막아내다’
● 구렁이를 잡아 죽인 정작(鄭碏)의 설화
●지역: 남양주시 진건면(읍)의 설화
어려서부터 특이한 재주와 술법이 있어 세칭 이인(異人) 이라 불리던 정작이 하루는 형 북창을 따라 시골을 가는 데 어느 마을의 한 집을 바라보더니, “야! 저 집이 딱하구나”하고 탄식을 하였다.
북창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소리냐. 잠자코 그냥 지나는 것이 좋다”하니 정작이 “벌써 발설을 하였는데 남의 재앙을 알고 구해주지 않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북창이 다시 “그래, 네 말이 옳다. 나 먼저 갈 테니 네가 가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정작이 그 집에 들어가 “지나가는 나그네가 길을 잃고 허기가 져 하룻밤 쉬어 가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인이 기꺼이 허락하였다.
밤중에 주인에게 말하기를 “아까 지나다보니 댁에 말 못할 화가 곧 닥치는데 이 화를 막아주려고 들어왔소”라며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화를 피하고 길한 일이 생길 터이니 어찌하겠소?” 주인이 깜짝 놀라며 정말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면 백탄 열 섬과 큰 궤짝 하나를 준비하라” 하였고 주인이 그대로 시행하여 백탄 열 섬을 마당 가운데 쌓아 놓고 관솔로 불을 붙이니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을 하였다.
이 가운데 6, 7살 먹은 주인 아들도 나와 불구경을 하였는데 정작이 아들을 잡아 궤짝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주인과 마을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정작은 태연하게 그 궤짝을 불더미 속에 집어던졌다.
모든 사람이 발을 구르며 “저런 미친놈이 남의 옥동자를 죽인다”고 야단들이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불 속에서 궤짝이 터지면서 별안간 비린내가 진동하더니 큰 구렁이가 타죽은 모습이 보였다. 정작이 하인을 시켜 불을 끄고 숯을 치우고 보니 부러진 낫 조각이 나왔다.
주인에게 보이며 “이 낫 조각을 알겠소?”라고 하니 주인이 가만히 이를 살피더니 “알겠소. 내가 수년 전 못을 파고 물고기를 기르는데 고기가 점점 줄어들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세히 보니 큰 구렁이가 있었소. 그래서 큰 낫을 나무 막대기에 매어 휘둘렀더니 구렁이가 용을 쓰다가 낫에 찔려 죽었소. 그때 낫도 부러졌소”라고 하였다.
주인은 하인을 불러 광 속에서 끝이 부러진 낫을 가져다 대어보니 꼭 들어맞아 모두들 놀라워했다. 정작은 “아들은 뱀의 정기로 원수를 갚으려고 태어난 것인데 며칠만 더 지났으면 집안을 완전히 망쳤을 것”이라고 하면서 “집에서 악독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차마 그대로 지날 수 없어서 행한 일”이라며 앞으로는 아무 걱정 말라고 하였다. 주인은 매우 기뻐하며 거듭 고마워했다.
‘시주대신 쇠똥을 퍼준 악한 부자의 최후’
● 벼락소(沼, 벼락이 떨어진 연못)
●지역: 남양주시 진건면(읍) 금곡리 벼락소
진접읍 금곡리에는 벼락소라는 장자못 유형의 전설이 있다. 금곡리 주곡마을에는 과거 신강역이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하였다. 어느날 스님 한 분이 오셔서 시주를 부탁하였는데, 신강역 부자는 시주 대신 쇠똥을 퍼주었다. 이를 본 며느리가 용서를 빌고 안타까운 마음에 쌀을 한 바가지 가득 퍼주었다. 그러자 스님은 며느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 말하고,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를 들은 며느리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스님을 따라 뒷산으로 올랐다. 그러자 갑작스레 하늘이 어두워지며, 천둥과 벼락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더럭 겁이 난 며느리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는데, 자신이 살던 신강역 부자의 집은 벼락을 맞아 불바다가 되었고 끊임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스님의 충고를 듣지 않은 며느리는 결국 산 중턱에서 돌부처가 되어버렸고, 폭우가 쏟아진 끝에 집터는 깊은 연못이 되고 말았다. 훗날 사람들은 이 연못을 가리켜 ‘벼락소’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장자못’ 설화는 지역별로 많이 존재하며, 흔히 장자의 악행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몰래 시주한 며느리가 중이 제시한 금기를 어겨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함께 붙어 있다.
‘정신차린 오라비는 사정없이 아랫도리를 돌로 내리쳤다’
● 달래강 설화
●지역: 남양주시 수동면 수동천(구 달래강 – 서리산 개울)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서리산에서 뻗은 물골안 개울에는 전설 지명들이 많은 편이다. 전설만을 의지하여 지명을 해석할 수는 없지만 선비가 거문고를 타다가 이 계곡 어딘가에 감추어 두었다고 해서 생긴 ‘비금계곡 (秘琴溪谷)’, 옛날 어느 스님이 밥을 먹다가 물에 빠뜨린 금숟가락을 건지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소’ 등등. 그리고 ‘달래’란 이름이 붙는 강이든 산이든 그 내용이 엇비슷한 ‘달래’ 전설이 내려져 온다. 수동천 역시 과거 달래강이라 불리었던 곳이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어렵게 생활하는 홀아비가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품팔이를 하고 돌아오던 아버지는순식간에 불어버린 개울을 건너다가 세찬 물결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마중을 나왔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오누이는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 날 이후로 오라비는 자신을 의지하는 여동생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여동생은 오빠를 위해 헌신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갔다.
이렇게 해가 바뀌고 어느덧 남매는 처녀 총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건넌마을로 품팔러 갔던 오라비가 술에 취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여동생을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다가 개울에서 발을 헛딛어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곳이 아버지가 화를 당한 자리라는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은 오라비는 술에 취한 몸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마중나와 있을 줄 알았던 여동생은 자기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 있었다. 젖은 옷을 벗던 오라비의 눈에는 문득, 달빛 틈으로 여동생의 흐트러진 모습이 들어왔다.
저고리 사이로 봉긋 솟아오른 두 개의 봉우리와 홑치마 밑으로 드러난 하얀 속살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던 오라비는 자신도 모르게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피끓는 나이에 술까지 마셨던 오라비가 이성을 잃고 누이를 덮치려는 찰나, 누이가 몸을 뒤척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오라비는 잔뜩 성이 난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개울로 내달았다. 그리고는 자책하면서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위에 대고 사정없이 돌로 내리쳤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던 오리비는 갑자기 움직을 멈추며 스르르 쓰러졌다. 밤중이 되어서야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깬 누이는 오라비가 벗어놓은 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오라비를 찾으러 개울가로 향했다.
저만치 너래바위 위에 발가벗은 채 누워있는 오라비를 발견한 누이는 순간, 모든 상황을 알아 차렸다. 누이는 오라비의 시신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말했다.
“어쩌자고 오라비에게 알량한 몸가짐을 보여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하지만 답답한 오라버니, 그렇다고 죽기는 왜죽어, 그렇다면 한 번쯤 말이나 해 보지, 차라리 한번 ‘달래’나 보지.” 그 후로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달래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달래’에 대한 전설은 달래라는 지명이 붙은 지역에는 비교적 흔하게 구전되는 편이다.
‘정조를 지킨 열녀로 대표되는 도미 부인’
● 팔당호, 그리고 도미부인 설화
●지역: 남양주시 조안면 – 광주시-양평군
남양주시와 광주시, 양평군을 아울러 있는 팔당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전한다. 남양주시가 와부읍 지명유례에서 ‘팔당 바댕이’라는 마을 이름은 팔선녀가 내려와 놀던 여덟 곳에 당을 지어 놀았다 해서 ‘팔당’이라 불리게 됐다는 주장과 강 양쪽에 자란 나무가 팔자(八字)처럼 쓰러져서 팔당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이 지역은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열녀 표상이 된 도미부인의 설화가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꼽힌다. 도미부인 설화의 시대적 배경은 개로왕 때이므로 백제가 한강유역에 자리 잡았던 한성백제의 시기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봉안마을 앞에 도미나루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팔당호 갓길을 도로를 따라 이어진 팔당댐 옹벽에는 연인들의 사랑 고백을 담은 낙서들이 매우 많다.
도미부인은 미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정절관념이 투철했던 백제의 여성이다. 도미부인은 정절관념에 투철했기 때문에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한 이래 조선시대에는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에 그대로 계승되었고, 조선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정조 때의 ‘오륜행실도’ 및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홍경모의 ‘중정남한지’ 등에 기록되어 열녀의 표상이 되었다. 이러한 설화는 단순한 열녀의 표상에 그치지 않고, 왕궁증축과 축성으로 대표되는 왕권강화책으로 인해 노역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망이 담겨있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시대상과 이름에 추측하여 해당 일화는 4대 군주인 개루왕(蓋婁王)이 아니라 21대 군주인 개로왕(蓋鹵王)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설화는 아래와 같다.
도미(都彌)는 백제인이다. 비록 평범한 백성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고왔을 뿐만 아니라 절조있는 행실을 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체로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치지만, 만약 으슥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 것이다.” 이에 도미는 “사람의 정은 알 수가 없는 것이지만 제 처와 같은 여자는 비록 죽더라도 변함이 없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이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두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을 왕으로 가장하여 의복과 말과 시종을 갖추어 밤에 도미의 집으로 가게하고, 미리 사람을 보내 왕이 온다고 알리게 하였다. 왕으로 가장한 이가 도미의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 너를 들여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너의 몸은 내 것이다.” 그렇게 그가 드디어 음란한 짓을 하려 하자 부인은 “국왕께서 헛된 말을 하실 리 없으니 제가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시옵소서! 저는 옷을 갈아입고 나서 모시겠나이다.”고 하였다.
물러나와 여종 하나를 단장시켜 들여보냈다. 왕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서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조그마한 배에 싣고 강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부인을 끌어들여 강제로 간음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이제 남편을 잃어 혼자 몸으로는 스스로를 부지할 수 없게 되었사온데, 하물며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목욕한 뒤에 오고자 하옵나이다.”
왕이 믿고 이를 허락하였다. 부인은 곧바로 도망하여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는데 홀연히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다가왔다.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다. 끝내는 구차하게 살며 나그네로 떠돌다가 일생을 마쳤다.
‘산이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세요’
● 알동산 설화
●지역: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내각교 아래
옛날 이 산이 어느 큰 장마에 가평에서 떠내려와 이 곳에 새 산을 형성하였다. 이에 가평 관원이 매년 이 곳까지 와서 세금을 받아갔다. 그 주인 장씨는 별 필요도 없는 산의 세금을 내기가 억울하였지만 관원의 위협에 눌려 하는 수 없이 꼬박꼬박 세금을 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끼리 그 억울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개탄하는데, 그의 어린 손자가 이 광경을 보고 ‘내년에 또 오면 우리는 그 산이 필요없으니 도로 가평으로 가져가라고 하세요’라고 하였다. 이에 그 조부가 쾌재를 부르고 다음해 가평 세금징수관원에게 손자의 말대로 하였더니 다시는 세금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곧 죽을 사람이 이상하게 춤을 추더라’
● 살내벌 이야기
●지역: 진접읍 부평리 광릉
살내벌은 광릉 앞에 있는 벌판을 말한다. 옛날 차수복이라는 사람이 임금이 능에 참배하러 가는데, 부채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그냥 갔다. 이에 임근에 대한 불경의 죄를 지었다고 하여 차수복을 동구 밖에서 참수하려 하였다. 사부족은 동구 밖까지 춤을 추면서 끌려 갔는데, 이때 마침 임금이 능에 참배를 하고 내려오다가 이를 보게 되었다.
임금은 곧 참수를 당해 죽을 사람이 희한하게 춤을 춘다고 해서 차수복을 살려주라고 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부채도 하사했다. 이때부터 차수복이 춤을 추었던 장소를 임금이 ‘살려주라’한 연유에서 살내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귀신 말을 들으니 황금이 나왔다고…?’
● 밤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어부와 물귀신
●지역: 미상(출처 : 남양주문화원 출판 ‘우리 고장 남양주’ – 제보자 김칠성)
옛날에 한 청년 어부가 살았다. 그런데 이 어부는 낮에 고기를 잡지 않고, 밤고기를 잡으러 다니길 어릴때부터 이십여년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의 배에 턱 붙들고 물속에서 누군가 올라왔다. 청년은 본척 만척하고 고기를 잡는데 그사람은 그렇게 배에 매달렸다가 도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튿날에도 또 그 청년은 밤고기를 잡으러 갔고, 또 다시 그 사람이 물 속에서 청년의 배에 올라오려고 했다. 그러자 청년이 물었다.
“당신이 사람이요 귀신이요?”
“나는 물귀신이요. 하도 내 물속에서 참 몇 년을 살다보니까 하도 심심하고, 당신이 이렇게 저녁마다 고기를 잡으러 나오는데 당신하고 좀 얘기도 할 겸 당신배에 이렇게 지금 매달렸으니 올라가리까?”
“올라오시오. 배를 타시오.”
그렇게 배를 타고 청년은 물귀신과 서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하던 도중 귀신은 “나도 낚시대만 하나 주우.”하여, 그렇게 청년은 낚시대를 건넸고, 그렇게 둘은 많은 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그렇게 둘은 두서너달을 지내면서 서로 친해졌고, 청년이 형을 하고 귀신이 동생을 하는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귀신이 말했다.
“형님은 내일 모레 서울 아무개 사는 그 외아들을 내가 열두시경에 여기 잡아 놓으면은 내가 좋은대로 가우. 그러니깐 그 사람 죽거든 절대 예 낚시를 하지 마우.”
그래서 청년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낚시도 안나가고 참고 있었다. 하루는 인제 그 귀신이 말하는, 그 애를 잡아놓는다는 날짜가 됐다. 그렇게 12시경에 나가니까 젊은 청년이 땀을 쭉 흘리고 강가로 뛰어 왔다. 그래서 그를 붙들었는데, 그러자마자 붙들링 청년이 까무라쳤다. 까무라친 이를 업고 그는 집에 들어와 아랫목에 눕혔다. 깨어난 청년은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이래저래 자초지종을 설명한 청년은 그와 함께 서울의 그의 집으로 갔다.
기절한 청년의 집은 사라진 이로 인해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마침 청년이 사라진 이를 데리고 가니, 그집에서는 아주 반가워했고 청년은 이만 돌아가려 했다. 들어가서 쉬라고 자꾸 잡아 끄는데도 청년이 돌아갈 것을 피력하자 차비를 주려했지만 청년 어부는 그마저도 거절하고 집으로 왔다. 이변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집에 돌아온 청년은 다시 밤낚시를 갔는데, 고기가 물어서 입질은 있으나 계속 빈 낚시만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밤낚시를 갔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나자, 다시 청년의 배에 귀신이 뱃전을 붙들고 올라탔다.
“어이 어서오게, 자네 좀 섭섭했지?”
“거 형님, 내가 형심한테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형님 그여 그 거시기 하셨수 그래.“
“여보게, 그 외아들인데 그거 어떻게 하나. 내가 딱해서 살려줬네. 자네 너무 노여워하지 말게”
“형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지요. 고기가 안물어서.”
“아, 고생은 뭐. 나야 맨날 뭐 그렇게 지내는 사람인데 고생이 뭐 있겠나?”
그때 귀신이 허리띠를 끌러 낚여서 잡힐 고기를 꿰어 가져왔다고 내놓았다. 그렇게 쏟으니 배 한가득 고기가 실렸다. 그렇게 청년과 귀신은 다시 서먹한 사이를 풀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다시 귀신이 청년 어부에게 다른 이야기를 했다.
“형님, 내가 한 사, 나흘씩 사람하나 잡아먹고 좋은데로 가니까 그때는 영 나오지 마슈. 나오지 마시고 엣헴, 형님한테 내가 좋은데 가서 편지할테니까 그 때 나오슈.”
그렇게 청년은 더이상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않았다. 그런 몇 일동안 동네에서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청년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고, 그 편지에는 ‘형님, 내가 여기 살고 있으니까 찾아오시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렇게 청년은 길을 떠났고, 찾아가보니 아주 깊은 산중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짓고 하인을 두고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인까지 부리며 청년을 마중을 나온 귀신을 아주 반가워했고, 귀신 아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꼬박 닷새를 아우의 집에서 머물렀던 청년이 돌아가려 하는데 귀신이 보따리를 건넸다. 돌아가는 길에 풀어보면 허사가 되니, 반드시 집에 가서 풀어볼 것을 당부하면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던 청년은 주막에 쉬면서 보따리를 풀어볼까 하다가, 마음을 돌려서 집에서 풀어보았다. 그러다 거기는 목침대만한 금덩어리가 있었고, 조금씩 떼어다 팔아도 다음날이면 원상태로 돌아오는 신묘한 물건이었다. 그렇게 청년은 부자가 되서 서울 어느 곳으로 이사가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인물
● 정작(鄭碏)
●지역: 경기도 양주시
과거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정작이라는 이름의 신통한 이능을 가진 전설적인 선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작은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금강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았다. 중년에는 처를 잃었으나 다시 장가가지 않고 금욕 생활을 36년을 하였으며, 여러가지 일화를 남기고 하직하였다.
정작은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데 능하였고, 의학을 잘 하였다. 또한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통달하여 글짓기에 능하였다. 정작은 세상에서 그림자가 없다고 전하였고,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
한 사람이 귀신에 씌어 병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정작이 이를 위해 약을 써주었다. 그런데 증세가 다섯번에 걸쳐 바뀌었고, 정작도 이에 맞춰 다섯 번에 걸쳐 약을 바꾸어 쓰며 효력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의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병을 앓고 있는 이에게 원한을 품어 옥황상제에게 고해 꼭 죽이려고 다섯 번이나 바꾸었다고 하였고, 정작 때문에 죽일 수 없으니 여섯 번째 증세를 바꾸어 이번에도 방해하면 정작에게 원수를 갚겠다 하였다. 그러나 정작은 꿈에서 깨어 이상하다 생각하였지만 증세가 바뀐 이에게 새로 또 약을 써서 고쳤다. 사귀가 원이 깊었으나, 정작이 범인과 달라 갚을 수가 없었다.
앞서 소개한 구렁이를 잡은 설화나, 귀신에 씌인 사람을 고치고 도술로 누각을 만들어 친구들과 풍류를 즐기는 등, 신이한 능력을 보인 인물이다. 이러한 정작의 신통술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초서와 예서에 통달한 이인 정작(1533~1603)과 연관된다. 정작은 귀신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을 살려 내기도 하고, 친구들과 유희를 즐길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아이템
● 목민심서
● 지역 : 남양주 실학박물관
『목민심서』는 목민관(牧民官), 곧 수령의 기본자세를 다룬 책이다. ‘목민’이란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이며, ‘심서(心書)’란 정약용이 실제로 목민관으로 재직할 때 목민할 마음을 가졌지만 실천할 수 없었던 현실을 담아내어 지은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약용은 1801년(순조 1)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된 후 오로지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여러 분야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유배에서 풀려나는 1818년(순조 18) 전후에 자신의 경험과 스스로 터득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방대한 저작을 완성했다. 『목민심서』는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학문적 깊이가 가장 깊어진 시기에 지어졌으며,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담은 대표적 역작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지배층을 부정하고 백성을 정치의 주체로 끌어올린 것은 아니다. 백성은 어디까지나 지배 계층이 포용하고 아껴야 할 대상으로 상정했다. 다시 말해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유교적 정치 질서 속에서 청렴과 애민(愛民)을 통해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목민심서』는 48권 16책의 필사본으로, 12개 편목, 6개 조항, 72조로 구성되었다. 각 조의 서두에 지방 수령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들을 간단명료하게 기록하고 있고, 이 규범에 대한 역사적 연원을 상세히 적었으며, 고금을 망라하여 이름 있는 치적과 공적에 대한 논평을 덧붙였다. 다만 책의 사용된 어휘 등 한문의 난이도가 매우 어려운 편이라, 오늘날 해석하는데에도 많은 노력과 수고, 시간이 들여졌다고 전해진다.
● 나전칠기
● 지역 : 전국
나전칠기는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형태로 오려 기물의 표면에 감입시켜 꾸미는 칠공예의 장식기법을 말한다. 나전을 풀이하면 소라 라(螺), 비녀 전(鈿) 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나전칠기는 일반적으로 목제품의 표면에 옻칠을 하고 그것에다 한층 치레 삼아 첨가하는 자개무늬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목칠공예에 부수되는 장식적 성격을 띠고 있다.
나전칠기의 장인들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나, 남양주가 상당히 유명하다. 한국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을 가리는 ‘한국나전칠기 기능경기대회’가 남양주에서 열리기도 하였으며, 나전칠기와 관련한 체험학습장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유명한 나전칠기는 2014년 일본에서 돌아온 유물 ‘고려 나전경함’이 있다. 해당 경함에 쓰인 나전 조각이 최소 25,000개에 이를 정도로 정교한 물품이며,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 계명주(鷄鳴酒)
● 지역 : 경기도 무형문화재 등록
계명주는 “저녁에 빚으면 다음날 새벽 닭이 울 때까지는 다 익는다”고 하여 붙여진 술 이름이다.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임원십육지에 ‘계명주’ 술 빚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으며 1,500년 전 중국에서 편찬된 중국의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에도 언급된다. 1,000년 전 중국 송나라 대 국신사를 수행한 서긍이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쓴 기행문인 ‘고려도경’에 고려인은 계명주로 잔치술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중국 술로 오해할 수 있지만 계명주는 한국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술이며, 평안남도 지방에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백제 한산 소곡주, 신라의 경주 교동법주와 함께 고구려의 술로 언급되는 술이기도 하다.
계명주는 급하게 술을 빚을 필요가 있을 때 만들었던 속성주(速成酒)로 일일주(一日酒), 삼일주(三一酒), 계명주 등이 이에 속하고 일명 엿탁주라고도 한다. 그러나 보름 이상의 정성스러운 제조 과정을 거쳐야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계명주는 크게 누룩으로 빚는 일반적인 속성주법을 기본으로 엿기름이나 조청, 사탕을 넣어 당화를 촉진하는 방법과 효모를 이용한 속성주법 등 두 가지 주방문이 존재하며, 특별한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약재를 첨가한 ‘약계명주’가 빚어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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