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우주는 안녕하십니까?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리고, 미국이 닐 암스트롱을 달로 보내던 우주 경쟁 시대 이후, 우주는 언제나 인류에게 갈망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미 인류는 수없이 많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얹어 반쯤은 우주에 발을 걸치고 있으며, 수많은 미디어는 인구 폭증으로 콩나물 시루가 되어버린 지구 생활의 끝에 일어나는 우주 개척의 여정을 그립니다.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지금이 아닐 뿐, 인류가 우주를 개척하게 되는 건 기정사실에 가깝겠죠.
게임 ‘IXION(이하 익시온)’의 기업인 ‘DOLOS(돌로스)’또한, 같은 생각을 했나 봅니다. ‘타이쿤’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원형 우주 정거장을 띄운 돌로스는, 우주 정거장 자체를 퀀텀 점프 시키는 ‘VOHLE’ 엔진을 달아놓고, 마치 인류의 큰 한 걸음을 떼는 것 마냥 런칭 콘서트까지 하며 타이쿤을 저 먼 우주 너머로 쏘아 보냅니다.
그런데 아뿔싸, 우주 정거장을 발진시킨 후폭풍으로 옆에 얌전히 있던 달이 깨박살이 나버렸습니다. 그 와중 지구가 멀쩡할 리가 없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렇게 출발한 타이쿤의 도착지는 최초 예정지인 프록시마 센타우리가 아닌 태양계였습니다. 출발 시기로부터 수십년이 지나, 태양계 곳곳에 돌로스를 저주하는 흔적으로 가득 찬, 처절하게 망해버린 태양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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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후의 방주를 굴려라
상황을 정리해 봅시다. 서문에서 살짝 말씀드렸듯, ‘익시온’은 굉장히 극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배경 설정을 지닌 게임입니다. 지구 자원의 고갈을 대비하고자 우주로 쏘아낸 개척선이자 우주 정거장 ‘타이쿤’이, 도리어 태양계를 박살내버렸죠. 퀀텀 점프로 잃어버린 수십 년 동안 남아있던 인류는 타이쿤과 돌로스를 저주하면서 사멸해 버렸고, 타이쿤은 인류의 절대 다수를 멸망시키며 우주로 날아오른 주제에 인류 최후의 방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지사장에 불과하던 플레이어는 윗선이 통으로 날아가버리는 대형 사고의 여파로 뜬금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남은 거라곤 퀀텀 점프의 여파로 너덜거리는 우주 정거장 하나가 전부죠. 평양 감사도 제 싫다면 그만이지만, 플레이어는 도망갈 구석도 없습니다. 우주에 남은 인류가 없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이 정거장을 굴리며 인류의 미래를 설계할 수 밖에요.
게임은 이 ‘대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가 아직 돌로스의 명을 받는 바지사장으로서 지구 궤도에 놓인 우주 정거장을 관리하던 시점이죠. 게임은 총 세 개의 장소에서 이뤄집니다. 시티 빌더를 해야 하는 ‘타이쿤’의 내부, 엔진을 수리하고 선체 안정도를 유지해야 하는 ‘타이쿤’의 외부, 그리고 탐사선과 화물선, 채굴선 등을 보내 부족한 자원을 수급하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우주’입니다.
‘튜토리얼’ 단계에서는 참 편합니다. 지구 궤도를 떠도는 함선들은 징징거릴 때마다 자원을 퍼다 주고, 질 좋은 지구산 음식과 뽀송뽀송한 새 일꾼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넘쳐나는 자원들을 받으며 주거지와 자원 가공 시설을 지으며 자생 가능한 폐쇄 생태계를 만들어내는게 튜토리얼의 목적이죠.
하지만 튜토리얼이 끝나는 시점부터는 본격적인 지옥이 펼쳐집니다. 불굴의 산업 역군이던 잔존 인류는 지구 파괴의 PTSD로 ‘지구병’을 겪으며 개복치가 되어 버리고, 플레이어의 여정은 ‘스타 트렉’에서 ‘이벤트 호라이즌’이 되어버립니다. 합금이 없으니 제철소를 지어야 하고, 식량이 모자라 곤충을 키워야 하며, 당연히 물도 부족해 우주 얼음을 녹여야 하죠.
그와중 일꾼들이 파업하지 않게끔 인신 공양으로 마음을 달래주고 망해버린 우주 곳곳에 보물처럼 묻혀 있는 냉동 인류를 꺼내 새 일꾼으로 무장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몇 개의 성계를 건너뛰면서 우주 정거장이 하나의 보급 기지로서 활용될 만큼 커지게 되면 본격적으로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면서 게임은 마무리됩니다.
더럽게 어려운 우주
개괄적인 설명이 끝났으니 보다 구체적으로 게임을 살펴 봅시다. 우주 정거장 ‘타이쿤’은 총 6개의 섹터로 이뤄집니다. 최초엔 하나의 섹터만 개방되어 있으며, 하나의 섹터에 수용 가능한 인구와 시설은 매우 한정적이다 보니 조금씩 새로운 구역을 열면서 정거장을 성장시켜야 하죠.
‘익시온’의 시스템은 거대한 순환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탐사를 통해 자원을 찾고, 이를 채굴해 가공 자원을 만들어 정거장의 유지비를 대는 한편 새로운 시설을 늘려야 하죠. 자원을 확보해 가공하려면 시설이 필요하고, 시설을 만들려면 자원이 필요한 형태입니다.
이 와중에 신경을 쓰며 관리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거주민들이 너무 과하게 일하지 않도록 시설 확충 속도를 조절해야 하고, 퀀텀 점프때문에 정거장이 너덜거린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EVA 도크를 충분히 배치해 꾸준히 정거장을 수리해줘야 합니다. 이런 서바이벌 경영물의 단골인 ‘딜레마’도 꾸준히 등장하는데, 정거장을 이끄는 리더로서 언행을 신중히 해야 하죠.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했다간 신뢰도가 퍽퍽 날아갑니다.
뭐 이쯤 되면 예상하시겠지만, 더럽게 어렵습니다.
‘익시온’의 플레이 감각은 마치 미로찾기와 같습니다. 문제는, 막다른 길에 들어섰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없이 그냥 망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상황입니다.
채굴선이 우주 폭풍에 휘말려서 터졌다 -> 철 수급이 막혔다 -> 합금 생산이 안 된다 -> 선체 수리가 멈췄다 -> 선체 안정도가 내려간다 으악 -> 쾅
매우 간단한 요약이지만, 이런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게임 상에서 쓰이는 자원의 수가 꽤 많은데, 이 중 고갈될 경우 그대로 멸망행 급행열차를 타는 자원이 한둘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자원을 그대로 사용하는것도 아니고 가공 과정이 수 차례 이어지기 때문에 가공 절차 중 뭔가 하나 과부하가 일어나면 모든 과정이 멈춰버리죠.
가장 기본이 되는 자원이자 익시온에서 없으면 그대로 망하는 현대인의 생활 필수품 ‘합금’을 얻기 위해서는 총 네 단계가 필요합니다. 탐사선을 보내 철광석을 찾고, 채굴선으로 이걸 캐고, 화물선으로 실어나른 다음, 제철소에서 합금으로 가공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합금이 생기죠. 이 자원 생산의 플로우가 하나라도 막히는 순간 정거장은 동맥 경화에 걸린 중환자마냥 비실거리다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더 큰 난점은 이 시티 빌더류에서 가장 기본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인구, 즉 맨파워조차도 채굴해야 하는 자원이라는 점입니다. 정거장의 인류는 오로지 일과 잠만 자는 금욕적인 이들이기에 인구가 자연적으로 늘지 않습니다. 게임 내에서 인구를 늘릴 방법은 우주 어딘가에 떠도는 폐허에서 냉동 인구를 캐서 인간용 해동 렌지에 데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적당한 수의 인구를 확보하지 못하면? 과로로 인해 사고가 발생해 작업장이 멈추고, 결국 파업에 들어가면서 정거장이 뇌사 상태에 이릅니다.
게다가, 게이머가 관리해야 하는 섹터가 6개인 점도 굉장히 까다로운 점입니다. 섹터 별 자원이나 인구 배치 등이 가능하긴 하지만 이를 모두 수동으로 해 줘야 하기 때문에 수시로 인구를 체크해 재배치하고, 자원을 분배해줘야 하는 등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더럽게 귀찮은데 이 와중 실수 한 번 했다가 동맥 경화가 오면 최악의 경우 게임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죠.
문제는, 이 모든 어려움이 플레이어의 도전욕구를 불러오기보단, 의욕을 꺾는 쪽에 가깝다는 겁니다. 소울라이크가 대두된 이후, 거시적 시점에서 게임의 ‘어려움’은 더 이상 단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최루탄에 켁켁거린 기억이 있는 예비역들이 매운 닭발은 돈 주고 사먹듯, 아무리 어려워도 ‘재미있게’ 어려우면 사실 단점이라 할 수는 없다는 거죠. 하지만 ‘익시온’의 어려움은 명백히 단점에 속합니다.
무참히 깨져도 수없이 도전하면서 방법을 찾아간다는 건 같지만, 액션 게임과 비교하면 그 과정이 너무 고단하고 복잡하기 때문이죠. 저만 해도 서너 번 쯤의 재시도는 별 느낌이 없었지만 챕터 3의 후반부에 자원이 막혀 정거장이 터졌을 땐 리뷰고 자시고 다 접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수시간에 걸친 개고생의 끝에 남은 건 울분과 허탈 뿐이었죠.
비범한 설정과 재미, 그리고 그 이상의 서러움
‘익시온’은 재미있는 게임입니다. 사실 이건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굳이 길게 말 안 해도, 제가 이 게임을 수십 시간을 하면서 리뷰를 쓸 마음을 먹었다는 거로 재미있다는 건 입증이 됩니다. 물론 플레이 시간의 10% 정도는 우울함과 분노에 치를 떨며 오기로 플레이했지만, 어쨌거나 90%의 시간은 재밌었습니다.
쓰레기만 가득하던 선체에 건물들이 옹기종기 생기는 것도 재미있었고, 처음 보는 성계의 소행성에 빨대를 꽂으며 탐욕스럽게 자원을 갈취할 때는 매스 이펙트2와 스텔라리스의 우주 탐사가 생각났습니다. 파업은 하지만 무기를 들고 일어날 정도는 아닌 거주민들에게도 애착이 생겼고, 똥에서 버섯을 만드는데 성공해 저세상 바이오스피어를 완성했을 때의 카타르시스도 대단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 이르는 길이 너무나 지난했고, 이 지난함의 과정에서 제가 느낀 감정이 도전 의식보다는 서러움과 억울함이었으며, 그마저도 결국 망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절망이 저를 꺾었습니다. 축하해요 불워크 게임즈. 1:0입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을 ‘망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조금씩만 손을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재미를 낼 수 있을 만한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이죠. 우주 정거장 주제에 EVA 도크를 만들어야 한다거나, 지역을 열 때마다 조각나려 하는 정거장 등 핍진성이 떨어지는 몇 가지 요소를 좀 그럴싸하게 바꾸고, 자원 관리 체계를 일부 자동화하는 등의 개선만 이뤄져도 익시온은 훨씬 재미있는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문명을 제작한 ‘시드 마이어’ 옹 가라사대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라 하셨습니다. 익시온에서도 게이머는 수많은 선택을 마주하게 되지만, 대부분의 선택이 파멸과 생존의 기로에 있는 만큼 이 무게감을 조금만 덜 수 있다면 훨씬 부담 없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되겠죠.
게임 내에서 지구를 떠나기 전,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말합니다. 앞으로 마주할 우주는 미디어에서 본 것 처럼 환상적이고 아름답기보단 황량하고 거칠 거라 말이죠.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진짜로 더럽게 거칠고 황량하더군요. 그래서 재미있었던 것도 있지만 말이죠.
그러니, 익시온을 플레이하고 계실 여러분께도 여쭙고 싶습니다. 당신의 우주는 안녕하십니까?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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