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조지 루카스 감독에 의해 1977년 ‘에피소드 4’가 처음 극장가에 걸린 이후, 이 스페이스 오페라는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성공적인 SF 프랜차이즈가 되었다.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주류 대중문화로 자리잡을 정도로 두터운 팬층을 형성한 지 오래고, 영화는 물론 소설, 코믹, TV시리즈 등으로 확산된 세계관은 지금도 넓어지는 추세. 거기에 최근에는 호평을 받은 ‘만달로리안’ 시리즈의 세 번째 시즌이 공개되며 다시 한 번 높은 인기를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워즈’에 대한 이처럼 폭발적인 인기는 아무래도 가장 큰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에서 두드러지는 편이다. 아무리 전 세계적인 인기를 가진 문화 콘텐츠라고 하더라도 국가별로 인지도의 차이는 있는데, 당장 국내 시장만 봐도 느낄 수 있다. 무슨 연유에선지 SF 장르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국내에서 ‘스타워즈’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저조하고, 매니아층만이 즐기는 콘텐츠라는 인식이 조금 더 강한 편이다.
물론,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유학을 다녀 온 고모가 선물해 준, 자막 없는 ‘스타워즈’를 수백 번도 넘게 돌려 본 나는 그 매니아 층 중 하나일 것이다. 당시엔 영어를 알 턱이 없으니 그냥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역시 광선검에는 어린아이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스타워즈의 이야기가 계속되어 온다는 것에 지금도 이따금씩 감동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는 한다.
몇 달 전, EA로부터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의 출시 전 시연을 위해 LA로 초청한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지만,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하지만 왜?’라는 궁금함도 들었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행사들이 온라인으로 전환된 것은 비단 국내의 일만이 아니다. 데모 버전을 체험하는 것 정도는 전 세계 기자들을 한 곳에 부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LA에 도착해 EA가 준비해 놓은 일정을 하나씩 참여하는 동안, 세계 각국의 많은 장소 중 하필 이 곳을 선택했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첫 날 일정은 LA 근처 애너하임에 위치한 ‘디즈니랜드 파크’ 투어였다.
오전에 출발해 거의 자정이 가까워야 호텔로 돌아가는 셔틀을 탈 수 있었던 탓에, 하루를 꼼짝없이 디즈니랜드에서 보내야 했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APAC 지역 기자들은 저마다 환상의 나라를 즐긴답시고 뿔뿔이 흩어졌고, 홀로 남아 걷는 디즈니랜드는 생각만큼 즐겁진 않았다.
이번 출장의 목적을 고려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갤럭시즈 엣지(Galaxy’s Edge)’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스타워즈 테마로 꾸며진 이 공간은 타투인 행성에서나 볼 법한 건축물들로 꾸며져 있고, 곳곳에 타이 파이터나 밀레니엄 팔콘, X-윙 같은 시리즈 전통의 기체들의 모형으로 장식되어 있다. 때때로 퍼스트 오더의 스톰트루퍼와 카일로 렌으로 분장한 이들이 순찰을 돌며 관광객과 의사소통을 나누기도 한다.
난생 처음 온 디즈니랜드 속 스타워즈 테마 공간을 돌아다니며 든 가장 큰 느낌은, 관광객들에게 ‘제대로 된’ 스타워즈의 느낌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이 한정된 공간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찾는 ‘갤럭시즈 엣지’의 공간 모두에는 공통된 세계관이 적용된다. 바로 이곳은 퍼스트 오더가 점령한 어떤 행성이며, 제국의 손으로부터 행성을 탈환하기 위해 반란군이 암약한다는 설정이다.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제국군은 순찰을 돌며 반란군의 위치를 캐기 위해 관광객을 심문하고, 자신만의 광선검을 만들어 주는 유명한 어트랙션인 ‘사비의 워크샵’에서는 제국군을 물리치는 제다이가 되라며 관광객들에게 광선검을 만들어 준다.
관련 어트랙션도 마찬가지로 이 곳의 세계관과 어울리는 테마로 된 놀이기구들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현재 가장 유명한 스타워즈 어트랙션인 ‘라이즈 오브 레지스탕스’는 디즈니랜드 개장과 함께 매진이 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하며, 그만큼 높은 퀄리티의 경험을 선사한다. 본고장 미국에서 스타워즈가 갖는 위상이 피부로 와닿는 경험이었다.
다음 날은 본격적인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의 시연 행사에 참가하는 날, EA가 준비한 행사 장소는 호텔에서 한 블록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점심 이후가 되어서야 행사가 시작했기 때문에 오전에는 여유 시간이 있었다.
디렉터 인터뷰 준비 등 취재를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뒤에도 시간이 남아 헐리우드 거리에 나섰는데, 얼마 걷지 않아 낯익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양한 문화 산업 굿즈를 판매하는 미국의 컬쳐 브랜드 ‘펀코’의 매장이다.
알고 보니 펀코의 헐리우드 매장은 지난 1월 경 오픈한, 비교적 최근에 생긴 곳이었다. 마블과 DC같은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는 물론 해리포터, 릭 앤 모티, NBA, 닥터 후 등 소위 ‘덕질’을 할 만한 콘텐츠는 전부 모아놓은 듯한 매장이다. 그 규모도 상당할 뿐더러, 자신만의 펀코 피규어를 만들어주는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어 LA를 방문한다면 한 번쯤 가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곳에서도 스타워즈는 자신의 미국내 인기를 한 없이 과시했다. 마블과 같은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아예 한 공간을 스타워즈 테마로 구성해 두었고, 과거 시리즈부터 최근 가장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만달로리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굿즈를 판매하고 있었다.
모스 아이슬리 칸티나에 앉아 있는 그리도는 가장 인상적인 조형물 중 하나였는데, 맞은 편 의자에 앉아 한 솔로처럼 포즈를 취할 수도 있도록 해 두었다. 과거 북미 스타워즈 팬덤에서 가장 핫한 소재였던, ‘한 솔로가 먼저 쐈다(Han Solo shot first)’는 밈을 적극 활용한 흔적이다.
이렇게 이번 LA 출장에서는 도착한 지 한나절 반만에 온갖 종류의 ‘스타워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국 대중문화의 큰 축으로 존재하는 스타워즈 IP에 대한 애정이 더욱 솟아나는 한 편으로는 EA가 스타워즈 신작의 시연 장소로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을 고를 수 없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스타워즈를 하나도 모르는 기자가 이번 행사에 참여했어도 귀국하는 날 쯤엔 디즈니+에서 에피소드1을 보게 되지 않을까.
마침내 본 행사인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의 시연 행사 시간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행사 현장에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사진 촬영이 제한되었다. 유일하게 촬영이 허락됐던 것 중 하나는 휴게 장소에 설치해 놓은 거대한 박타 탱크(세계관 속에서 의료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설비)였는데, 이번 작품의 시연 행사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약 네 시간에 걸친 신작 시연 기회, 그리고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을 총괄한 스티그 아스무센(Stig Asmussen)디렉터와의 인터뷰는 말 그대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주최측인 EA는 이 네 시간을 위해 전 세계의 미디어와 크리에이터를 LA를 부른 것이나 다름없다. 최종 빌드가 아닌 만큼 오류가 발생하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행사는 큰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됐다.
일반적인 경우 해외 취재 도중에는 행사가 마무리되면 지체 없이 숙소로 돌아가 기사화를 해야 하는 숙명이 함께 주어진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강연을 듣고, 숙소로 돌아와 새벽까지 기사를 만들어야 하는 GDC 취재가 가장 고난도의 출장 중 하나인 이유다.
하지만 몇몇 취재의 경우, 주최측에서 기사 게재를 특정 날짜 이후로 요청하는, 소위 ‘엠바고’를 지정해 두기도 한다. 이 경우엔 행사 종료 이후 당장 숙소로 달려가 기사화를 하지는 않아도 되는 여유가 생기는 편이다. 이번 취재의 경우에는 후자에 속했고, 전날부터 계속된 주입식 ‘스타워즈’ 덕심의 여파로 참석 미디어에게 제공된 애프터 파티에 참여하기로 했다.
해외 행사 현장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애프터 파티는 보통 참석자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얼굴을 익히는, 소위 네트워킹을 위한 시간이다. 국내에서도 코로나19 이전까지는 지스타 행사 도중 ‘네트워킹 파티’를 개최하는 기업들이 더러 존재하기도 했다.
물론, 국내 취재진에게 타국의 낯선 땅에서 진행되는 파티는 여간 난이도가 높은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통역이 지원될 리 만무하고, 먼저 나서서 말을 걸지 않는 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찾기도 힘들기 때문. 다행히 이번 여정에는 한국의 게임 크리에이터 GCL의 편집자가 함께 참석해 부담은 적었고, 다들 스타워즈 팬심으로 한데 뭉쳐 있다보니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수월했다.
그렇게 방금 플레이해 본 스타워즈 신작에 대해 글로벌 기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던 중, 행사장 저편에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니 검은 색 정장을 빼 입은 훤칠한 남성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얼굴이 낮익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오더의 몰락’부터 주인공의 얼굴과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 캐머런 모나한(Cameron Monaghan)이었다.
시시각각 많아지는 인파에 그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자 크리에이터 GCL과 함께 사진을 요청했는데, “한국말로 You’re Welcome을 뭐라고 하느냐”며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번 시연회에 참석한 이들을 위해 잠시 얼굴을 비추러 온 줄 알았던 캐머런 모나헌은 자신에게 셀카를 부탁하는 모든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대화를 이어나가며 파티가 끝나기 직전까지 자리를 지켰다.
애프터 파티에 온 사람들 중에는 캐머런 모나헌 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엄청난 인지도를 가진 사람도 자리했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저기 빈센트가 왔는데, 너도 인사하지 않을래?”라고 묻기에 그러자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인피니티 워드의 창립자이자 리스폰 엔터테인먼트의 공동 설립자, 현 세대 FPS의 아버지 중 하나인 빈스 잠펠라(Vince Zampella)였던 것.
여느 해외 기업의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수더분한 차림으로 파티에 참석해 있던 빈스 잠펠라의 모습을 보니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을 것이다. 수줍은 셀카 요청(?)도 흔쾌히 받아준 빈스 잠펠라와 이번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몇몇 다른 기자들에 의해 요 근래 등장한 스타워즈 시리즈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나누는 자리가 이어졌다. 격앙된 목소리로 오비완 케노비 시리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답한 그의 뜻밖의 답변은 덤.
“음, 난 좋던데? 그래도 재밌었잖아”
얼마간 이어진 빈스 잠펠라 대표와의 수다 이후, 이른 아침 귀국행 비행기를 탑승해야 했기에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그렇게 이번 해외 출장의 여정은 끝을 맺었다. 미국 땅에 있던 이틀 내내 스타워즈만 보다가 돌아온 기분이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몸이 피로한 와중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시연 행사를 할 수 있었을 EA가 굳이 전 세계 기자들을 LA로 부른 이유, 알면 알수록 스타워즈라는 IP에 진심인 미국 사람들, 그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진심을 다해 공간을 꾸며둔 디즈니랜드,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 헐리우드 배우와 개발사 대표까지.
이 모든 것들의 공통된 요소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일같이 문화콘텐츠가 갖는 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오늘날,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 필요한 것은 이런 진심이 아닐까.
언젠가 우리나라의 게임, 문화 콘텐츠를 보기 위해 전세계에서 방문한 기자들로부터 내가 느낀 종류의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 지금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자랑스러운 콘텐츠들이 있는 것을 볼 때, 그리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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