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게임들이 나라별, 대륙별 유구한 역사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도 땅은 좁지만 수많은 신화와 민담,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중국 삼국지나 북유럽, 그리스 신화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민담과 전설이 많이 있죠. 인벤에서는 한국 신화의 게임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며 지역별 설화를 소개해 드리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지역 : 합천군(Hapcheon) 현황 : 면적: 983.04㎢ (경남 전체의 9.4%) / 인구: 총 24,186세대/43,007명 설명 : 조선시대 이후 호칭된 지명이다. 조선 태종 13년에 행정구역 개편 시 주가 군으로 강등되면서 합천이라 하였으며 합천은 좁은 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산이 많고 들판은 없어 온통 산으로 둘러 쌓인 좁은 계곡이 많다는 뜻이다.
[합천군 지역 설화] #취재를 위해 직접 다녀온 합천군은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합천군 홈페이지도 각종 설화와 민담을 잘 담았으며 기록에 남지 않은 자료는 지역 주민의 구술을 빌려 서술해 놓았습니다. 덕분에 자료 조사하기 편했죠. 합천군의 민담과 설화는 합천군사 3권 문화예술과 인물편에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원문 그대로 담았지만, 한자나 지금은 쓰지 않은 사어(死語)가 많아 읽기 편하게 조금 편집, 각색해서 정리했으며 일부 삽화는 그림 AI(midjourney)를 통해 만들었습니다.
‘소똥에 박힌 보리알 씻어 부모님께 봉친하다’
●번개들과 강평궤(降櫃坪, 쌀궤가 내려온 들판)
●지역: 합천군(경상남도 서북부의 산간내륙 지대) 설화
고려 공민왕 시절, 이온(李溫)선생 부부는 늙은 부모를 보양하며 겨우 끼니를 떼우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극빈한 살림에 몸과 마음마저 지쳐가고 있을 무렵 부모님을 드릴 식량까지 바닥나고 만다.
이온 선생 부부는 어떻게든 노쇠한 부모님의 끼니를 연명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처없이 길을 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온 선생 부부는 봄 보리가 누렇게 익은 들녁 길에 소 한마리가 길 위에 똥을 철퍽 철퍽 쏟아내며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부부는 소똥의 색깔이 기이해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는데 아직 소화되지 않은 보리쌀이 소똥에 빼곡히 박혀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을 본 이온 선생 부부는 이 보리쌀을 주어다가 열 번이나 씻은 다음 밥을 지어 봉친했다. 그날 부부는 앞 들에서 모심기 품팔이를 하는데, 별안간 동남풍이 불어 검은 구름이 온 하늘에 뒤덮더니 뇌성호우에 천지가 진동하다가 무지개가 공중에 빛나더니 괴이한 궤짝 하나가 떨어졌다.
모를 심던 사람들이 한편 놀라고 또 이상해서 궤짝 주위에 모여들어 열려고 했으나 못 열더니 이 부부가 손을 대니 힘 안 들이고 열렸다.
궤속에는 백미가 가득 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명이 감동하여 떨어진 것이니 이온선생 부부에게 이 궤짝을 주기로 하였다. 기이하게도 3년동안 쌀이 궤속에 가득차 있었다가, 한번은 이웃사람이 저녁꺼리가 없어 쌀을 빌리러 왔기에 조금 주었더니 그 후로 쌀도 궤짝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 번개들은 삼가면 외토리 용호정 앞들에 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천지신명이 감응, 쌀 궤짝을 이곳에 내려 주었다고 사람들은 비를 세워 후일에 남겼다고 한다.
‘상사병에 걸려 죽은 여인네, 구렁이가 되다’
●정인홍에게 복수한 여인네
●지역: 합천군 설화
조선 광해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정인홍은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이다. 조식이 젊었을 때 한양에 과거보러 가다 어느 주막에 들렸다. 주막의 젊은 여주인은 조식을 보고 한눈에 반했는데 상사병을 앓아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여인은 죽은후 구렁이가 되었는데 조식을 잊지 못하고 그의 집에 찾아왔다. 조식은 구렁이를 측은히 여겨 벽장에 넣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 보았다.
당시 해인사 어느 암자를 빌어 12명의 제자를 가르치던 조식은 춘삼월 따스한 봄날을 택해 제자들을 가야산봉에 소풍보냈다. 조식이 집에 누워 쉬고 있었는데 벽장의 구렁이가 나와 그를 괴롭혔다.
소풍 나갔던 정인홍 등 12명 제자들은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정인홍은 갑자기 내려가지고 외쳤다. 영문을 모르는 동료들은 밥이나 먹고 가지고 말했으나 스승님이 뱀에게 곤욕을 겪고 있으니 구해야 한다면서 동료들을 재촉했다. 스승에게 달려와 문을 활짝 열고보니, 구렁이가 스승의 몸을 휘감고 있는게 아닌가.
이에 정인홍은 단 칼에 뱀을 죽여 버렸다(일설에는 정인홍은 눈동자가 둘이라고 하며, 눈을 크게 부릅뜨면 태양빛과 같아 미물들은 죽어 버린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1년뒤 정인홍의 삼촌이 구렁이(뱀)의 화신인 아들을 낳았는데 훗날 이 아들의 행동으로 1623년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정인홍은 죽게된다.
’99개의 산(山)을 움직이는 거북이’
● 법륭산(法隆山)에 얽힌 전설
●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뒤에 우뚝 서있는 법륭산은 그 산세가 웅장할 뿐 아니라 골짝이 깊고 또 작은 골이 많기로 소문나 있다. 옛날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나 근처에 있는 작은 산들을 하나씩 등에 갖다 붙여서 무려 99골이나 되었는데, 1백골만 되면 이 영산의 위대한 정기를 받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인물이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산 하나를 막 지고 오는데 마침 어떤 계집아이가 이를 보고 “저기 거북이가 산을 지고 온다”고 외치는 바람에 놀란 거북이는 그만 등 위에 지고 오던 산을 내동댕이 치고 사라져 버렸다. 결국 1백 골짜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말았다.
이같은 전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지금도 들판 한가운데 독뫼산이 마치 법륭산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우뚝 서 있으며, 그 뒤에는 길다랗고 나지막한 능선이 질질끌려 가듯이 쭉 늘어져 있다.
‘떡 못 받은 도깨비의 복수’
●도깨비보
●지역: 경남 합천군 봉산면 노곡리, 묘산면 관기리 설화
도깨비보는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에 있다. 이 보는 홍수만 휩쓸고 나면 꼭 돌 한 개가 빠져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그때마다 보수를 해도 다음해 홍수가 나면 역시 빠지고 없었다. 어느날 주민 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갖가지의 모습을 한 도깨비들이 꿈에 나타나 이구동성으로 “우리들에게 떡을 만들어 주면 보 이빨이 빠지지 않도록 해주겠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그는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서둘러 떡을 만들어 보로 달려갔다. 그는 도깨비들을 큰소리로 부르면서 떡을 보에 던졌습니다. 하루종일 마음이 시원한 그는 그날 밤 다시 꿈을 꾸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괴상한 도깨비 한 놈이 나타나더니, “어제 다른 친구들에겐 맛있는 떡을 주고 나에게는 왜 주지 않았오. 어렇게 차별하기요. 내가 쌓은 보의 돌은 당장 빼어 버리겠오. 후회마시오”라며 투덜되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관기리 마을 앞의 보는 홍수때마다 보가 터져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 보를 ‘도깨비 보’라고 불렀다.
‘쇠로 된 갓이라니 무슨말이오’
●석가산의 쇠갓
●합천군 봉산면 저포 1구 박문목
오도산 하봉의 능선이 활대처럼 곡선을 이루며 내려와 용처럼 우뚝 솟은 석가산 봉우리에 큰 무덤이 있다. 옛날 부호이던 이 고을의 창년 조씨 한 분이 상을 당하여 명지를 찾아 일등 풍수사를 대동하고 다니다가 이 곳에 당도했다.
일등 풍수사가 무릎을 치며 “천하 명지가 예 있구나”하여 자침으로 묘자리를 잡아주며 “부자정 모퉁이에서 쇠갓을 쓴 사람이 지나가거던 하관(下棺)해야 되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차후 큰 인물이 뜻을 펴지 못한다”고 하였다.
쇠갓이라니 의아햇지만 상주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오전부터 운사하여 놓고 부자정 모퉁이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쇠갓 쓴 사람은 지나가지 않고 서산에 해만 기울기 시작하였다.
상두꾼과 조객들이 풍수사를 원망하며, 상주에게 하관할 것을 권유하자 상주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그만 하관하고 말았다. 흙을 덮어 달구질을 하는데, 화가난 풍수사가 “저기를 보아라”하고 고함을 치는데, 부자정 모퉁이를 바라보니 부녀자 한 사람이 흰 옷을 입고 솥뚜껑을 이고 모퉁이를 지나오고 있었다.
그 후 남아가 태어났는데 눈동자가 남달리 크며,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으며, 남달리 총명하여 보는 이마다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남아가 자라 성인이 되자 덕망을 사방에 떨치더니, 때마침 한양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주민을 선동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날개 달린 소년장군의 최후’
●‘갈밭골의 류장군’
●합천군 초계면 정곡마을
갈밭골 문화 류씨 후손중 힘이 장사이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친 소년 장군이 하나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창녕조씨 편모슬하에서 자라며 초계 향교까지 글을 배우러 다녔다. 초립동이일 때 향교에 갔는데, 비가 엄청 내려 향교 앞 다리가 넘쳤다. 소년장군은 부친의 기일이라며 훈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갓길에 나섰다.
훈장인 초계 원님이 마음이 안 놓여 좌수를 불러 뒤따라 가보도록 하였다. 사정천에 도착하자 소년장군은 인근의 버드나무를 꺾어 징검다리를 만들어 쉽게 건너갔다. 사실을 보고받은 원님은 이 아이가 예사인물이 아님을 알고 크게 걱정하였다.
힘이 장사이고 겨드랑이에 날개까지 달렸으니 역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님은 소년장군과 친한 학생을 시켜 어떻게 하면 소년장군이 힘을 쓰지 못하는지를 알아내도록 했다. 소년장군은 친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자기가 잠들었을 때 유씨 선산의 쑥대를 꺾어 겨드랑이 날개 밑을 찌르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원님은 그대로 하여 소년장군을 손쉽게 붙잡아 죽이고 말았다. 지금도 억울하게 죽은 소년장군의 묘가 정곡마을 서남쪽에 있고, 장군묘라 부른다.
‘가면을 쓰자 전염병이 사라졌다’
●초계(草溪) 오광대가면극의 유래에 대한 전설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옛날 어느 대홍수 때 큰 궤짝 하나가 초계 밤마을에 떠내려 왔다. 그 속에는 가면이 가득 들어 있었으며, ‘영노전 초권(初卷)’이라는 책이 들어 있었다.
당시 이 마을에는 전염병과 재앙이 그치지 않아 좋다는 방법을 다 동원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데, 한 사람이 탈을 쓰고 책에 쓰여 있는 대로 놀이를 해 보자고 하여 그렇게 했더니 재앙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탈을 쓰고 연희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가면극의 원래 목적이 귀신을 쫓고 복을 맞이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경상남도의 각지에서 여러 오광대 문화가 있고 시작한 연대와 경위는 각기 다르지만, 구전에 의하면 초계 밤마리(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의 대광대패와 의령 신반의 대광대패가 각각 놀던 오광대를 각지 사람들이 보고, 자기 고장에서 놀기 시작하였거나 다른 지방의 오광대를 보고 받아들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합천군 덕곡면(면장 홍석천)은 2016년 7월 덕곡면의 진입 관문인 율지 회전교에 합천 밤마리가 오광대 발상지임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상징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거인의 환생과 팔만대장경’
● 법륭산(法隆山)에 얽힌 전설
●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개간에 관해서 합천에 사는 이거인(李巨人)이란 사람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거인은 비록 가난했으나 성품이 착하고 어질어 이서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동네사람들은 그를 인서라 불렀다. 동네를 다니면서 세금을 받아 귀가하는 어느날 이거인은 세눈 달린 강아지를 보게된다. 그는 이 강아지를 키웠는데 강아지는 크면서 모양이 사자와 닮아가고 성질은 착하고 온순하여 아침 저녁으로 주인을 오리밖에까지 마중하곤 하였다.
이거인은 이 강아지를 무척 귀여워했지만 데려온 지 3년만에 갑자기 앉아서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바보다 죽어버렸다. 개가 죽자 이거인은 관에 넣어 제물까지 마련해서 장례를 잘 치뤄줬는데 이거인 역시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죽고 말았다.
이거인은 죽어서 명부(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불교법정)에 갔는데 세눈을 가진 왕이 옥봉관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세눈왕은 이거인을 보자 곧 뛰어 내려와 반갑게 손을 잡고는 “어떤 일로 주인께서 이 곳에 오게 되셨느냐”면서 그간의 경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연인 즉, 몇해 전에 명부에서 허물이 있어 강아의 몸으로 3년동안 귀양살이를 할때 뜻밖에도 주인(이거인)의 후한 대접을 받고 지내다가 다시 명부에 와서 복직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주인의 신세를 보답해야겠으니 염라대왕 앞에 나가거든 그가 이르는대로 대답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염라대왕의 질문에 무사히 통과한 이거인에게 세눈왕은 “이제 인간세상에 돌아가거든 종이로 책을 매어 제목을 팔만대장경판곽공덕문’이라 적고 권선문을 만들어 아에 도장을 받은 다음 내가 나갈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다.
이거인은 이 같은 말을 듣고 물러 나왔는데 홀연히 깨어나니 꿈이라 세눈왕의 말대로 권선문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어느 화창한 봄날 궁중에서는 신라 공주 자매가 한꺼번에 병이나서 자리에 눕더니 병안간 부왕에게 속히 대장경 화주(중생을 교도하는 교주)를 불러주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라며 나라안에 명령해서 화주를 만나게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바로 왕명이 내려지자, 합천의 태수는 곧 이거인을 수도로 올려보낸다. 공주는 이거인을 보자 그가 바로 세눈왕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승에서 다시 왔노라면서 부왕에게도 “큰 시주가 되어 이 일을 성취하도록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대장경이 이뤄지면 공주들도 무사할 뿐만 아니라 나라도 강해지고 임금도 장수하게 될 것이라 했다.
이같은 말을 듣고 왕은 쾌히 승락. 이거인을 융숭히 대접한 다음 많은 사재를 내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안의 여러 목공과 조각공들을 모아 거제도의 목재를 날라다 대장경을 새기게 한 뒤 가야산 해인사에 모시고 열두번의 경찬회를 베풀었다. 이렇게 해서 팔만대장경은 이루어졌는데 이후 이거인 부부는 여생을 편안히 오래 살다가 극락왕생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전설은 가야산해인사사적에 “왕후의 발배(發背)의 환(患)이 석덕이승의 기적으로 차효를 보게 되었다 하여 애장왕 3년(802)에 해인사를 창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인사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海印寺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의 조(條)에는 “합천인 이거인(李居仁)이 정묘 춘삼월에 신라 공주 자매의 시역(時疫)을 퇴치하기 위하여 장경의 각판을 발원하였는데, 왕도 재(財)를 사(捨)하고 내외의 조각공을 모아 거제도에서 판목을 만들어 가야산 해인사에 운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처녀의 외침에 바위가 멈추다’
● 학바위 전설
● 성주군 수륜면 학동마을
성주군 수륜면 학동마을의 논 한가운데 서 있는 학바위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 앞에는 맑고 깨끗한 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녹음이 짙은 가야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솟은 유서 깊고 경치 좋은곳이기도 하다.
여름 어느날 예쁜 처녀가 앞 개울 물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을때 갑자기 아름다운 노래소리와 함께 해 맑은 빛이 내려쬐이며 아주 괴이하게 생긴 큰 바위 하나가 저 멀리서 들 가운데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처녀가 깜짝 놀라 “앗! 저 바위가 우리 동리까지 내려오네!” 하고 고함을 질러 버리자, 그만 바위가 들 가운데서 멈칫 서 버렸다는 것이다.
그후 이 동리에 어른들의 입에선 요망스러운 계집 때문에 바위가 들 가운데 멈추어 버려 동리가 망하게 되었다느니, 또는 이 바위가 동네까지 들어오면 동네가 망하게 되었을 텐데 잘된 일이라느니, 별의별 이야기가 떠돌게 되었다.
마침 이때 가야산 중턱 용기골에 큰 절이 있었는데 여기에 있던 중이 소문을 들었다. 당시는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던 시대라 이 산에 있던 중들은 학동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짐승들처럼 밤을 이용해 다녀야 했다.
이런 고충 속에 있던 중들은 마음속으로 “그것 잘 되었다” 면서 손뼉을 치며 좋아들 했었다. 즉시 마을로 내려온 중은 “저 바위 속에는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고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 위대한 위인이 나타날 것이며, 이 마을은 아주 풍성한 낙원이 될 것이다.” 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용기골 중이란 것을 알고 체포하여 심문했다. 이 중은 소문과 같이 한 마디도 틀리지 이야기 하면서 “의심스럽거든 자신을 묶어 놓고 바위를 깨트려보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차츰 중의 말을 믿게 된 사람들은 의논한 결과 날짜를 정하여 바위를 깨어 보기로 했다. 동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깨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거의 반쯤 깨었을때 바위가 갑자기 소리를 내면서 두쪽으로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학 한 마리가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가 삽시간에 온 동리를 휩쓸어 버렸고, 또 거기에서 붉은 피까지 흘러 나왔다. 동리는 물 바다가 되고, 붉게 물들었다. 평화롭던 동리에는 순식간에 울음소리로 변했다. 마을 사람들은 중이 살고 있는 용기골 절을 찾아가 그 절을 부서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바위를 학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물
●무료대사
●지역: 합천군 운교동
덕곡면 장리 소재 다남산은 괴암절벽이 수려하다. 여기에 옛날 무료대사라는 노승이 살던 절터가 있었는데 이 노승이 다남산과 소학산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아 그곳을 왔다갔다하며 도를 닦았다고 한다.
하루는 이 노승이 마을에 시주를 받으러 내려왔다가 마을 사람들이 하도 착하고 순박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놓고 사라졌다고 한다.
“닭의 발이 셋이고 송아지 발이 여섯인 괴상한 동물이 나타나면 빨리 동네를 옮기시오”
그후 세월이 흘러 노승의 예언대로 그런 괴상한 동물이 나타나자 마음 사람들은 노승의 말을 믿지 않고 재수가 없다하여 그만 그 동물을 죽여 버렸다. 그때 갑자기 폭우가 몰아치면서 동네를 휩쓸어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위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신기동 일명 세터라고 부르는 곳이며 옛 구름다르 자리가 현재 운교동이다.
●무학대사
●조사지역 : 합천군 대병면
합천군지의 무학대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전무학.후무학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의 도읍지를 서울로 정한 조선태조 王師 무학은 대병면에서 출생한 실존인물로서, 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이고 호는 무학이다. 출생지는 삼기군으로 지금의 대병면이며, 아버지 박인일과 어머니 공성채씨 사이에서 고려 충숙왕 14년(서기1327년)에 출생하여 조선 태종 5년(서기 1405년), 79세 되던 해 타계하였다.
『오사설림초기』에 의하면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기전,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그꿈에 넘어지는 집에서 재목인 서까래 세개를 등에 걸머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날 사냥을 하러 갔는데 우연히 산중에서 수도하고 있는 무학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이성계가 간밤에 꾼 꿈이야기를 하니 무학이 해몽하기를 장차 왕위에 오를 꿈이라고 하면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말대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꿈을 해몽해 보면 3개는 석삼자(三)이고, 그것을 등에 짊어졌으니 이것이 임금왕(王)자가 된 것이다).
무학 도사는 태조 등극 후, 세 관찰사를 보내 무학대사를 찾아와서 태조를 크게 도왔다. 무학이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자고 하였고 정도전이 반대하였으나 태조는 무학의 말대로 한양 땅을 도읍지로 정했다
아이템
●최치원의 지팡이 (학사대 전나무)
●합천군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는 신라 말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다. 그는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7년 동안 머물면서 장원급제하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를 지어 뛰어난 글 솜씨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29살 때 귀국하여 한림학사, 병무시랑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진성여왕 8년(894) 나이 37살 때 아손이란 벼슬을 받았으나 6두품이라는 그의 신분한계와 부패한 사회상을 한탄하여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방랑생활에 들어간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랑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가야산 일대이다. 그는 지금의 해인사 대적광전 서쪽 언덕에 자그마한 정자를 짓고 그가 지낸 한림학사란 벼슬이름을 따 학사대(學士臺)라 했다.
여기서 선생이 가야금을 켜면 수많은 학이 날아와 고운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조용히 글을 읽고 시를 읊조리면서 유유자적한 만년을 보내다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 지팡이를 꽂고 갈 것이니 만약 싹이 터서 잘 자란다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니 학문에 전념하라.’면서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사라져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선생이 꽂아 둔 지팡이가 자라 지금의 전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해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900년대 초로 본다면 전설의 전나무 나이는 약 1,100년에 이른다.
●고리자루 큰 칼 – 환두대도(環頭大刀)
●합천군 해인사 박물관
고리자루 큰 칼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칼이다. 자루 끝 모양을 기준으로 둥근 고리, 둥근 고리 안에 세 개의 가지, 세 개의 고리가 있는 것, 봉황이나 용이 표현된 것 등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중 봉황이나 용이 표현된 것은 최고 지배자들이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가야 지역에서는 고령 지산동, 합천 옥전동 고분에서 확인되었으며, 신라와 백제 지역에서는 천마총과 무령왕릉과 같은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곳에서 출토되었다. 이 칼은 둥근 고리안에 목을 겹치며 다른 방향을 보는 용과 봉황이 장식되어 있는데, 용과 봉황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옥전 M3호분에서는 고대 신화 속 신령스러운 동물인 용과 봉황문양으로 장식된 고리자루큰칼 1자루, 용봉문양고리자루큰칼 2자루, 용문양고리자루큰칼 1자루 등 총 4자루가 출토되었다.
고리 내부에는 용과 봉황이 배치되어 있고, 고리 부분과 손잡이 위아래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특히 새겨진 용은 쌍룡으로, 손잡이 위아래, 앞뒷면으로 모두 새겨져 있어 한 자루에 10마리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손잡이 위아래 용 문양은 얇은 금판을 두드려 도드라지게 만들었는데, 2마리의 용이 서로 비틀며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을 새겨 놓았다. 이 칼들은 섬세한 금속공예 기법 및 조형미에서 가야를 대표하는 유물로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강령과 금강저
●합천군 해인사박물관
금강령 : 불교의식에 쓰이는 불구 중 하나이며 갈고리가 다섯 개인 오고령이다. 가지는 용이 받치고, 손잡이에는 연꽃이 표현되어 있다. 몸통 하나는 6구의 신장상이, 다른 하나는 오대명황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금강저: 본래 고대 인도의 신이 사용하던 무기의 일종이었다. 밀교에서는 진언을 외울 때 휴대하는 의식 용구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을어 모든 악마를 물리치고 지혜광명을 발현시킨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 금강저는 중앙 손잡이 부분과 양 끝 다섯 개의 손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오고이다.
●업경대(業鏡臺)
●조선시대 불교 유물
업경대는 명도(冥途: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간다고 하는 암흑세계)에서 염라대왕이 죄인의 업을 비쳐 나타낸다고 하는 거울이다. 합천에서 발굴된 유물은 아니지만 불교시대 대표 유물이라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한다.
업(業)을 나타내는 거울의 대(臺)로서 업경륜, 업경이라고도 한다.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 권하에는 “1년에 3회 정월과 5월, 그리고 9월에 명계(冥界)의 업경륜이 남섬부주를 비치는데, 만약 선악업이 있으면 거울에 모두 나타난다.”고 하였다.
보통 업경대는 나무로 제작하고 경륜(鏡輪)은 금속 또는 나무로 만들어 채색하기도 한다. 거울은 원형이 보통이며 타원형도 있다. 거울 주변에는 불꽃문양을 사실적으로 나타내 명도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크기는 50∼60㎝의 것이 보통이고, 어떤 것은 1m가 훨씬 넘는 것도 있다. 그 중에는 조각이 우수하여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도 있다.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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