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화 게임이 되리 #6 낭만과 충절이 가득한 청주


많은 게임들이 나라별, 대륙별 유구한 역사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도 땅은 좁지만 수많은 신화와 민담,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중국 삼국지나 북유럽, 그리스 신화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민담과 전설이 많이 있죠. 인벤에서는 한국 신화의 게임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며 지역별 설화를 소개해 드리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 지역 : 청주시(Cheongju City)
  • 현황 : 면적: 940.84㎢ / 인구: 851,653명
  • 설명 : 청주는 충청북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삼국시대에는 상당(上黨)·비성(譬城)·자곡(子谷) 혹은 상당현(上黨縣)·낭비성(娘譬城)·낭성(娘城)·낭자곡(娘子谷)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시대에는 서원부(西原府)·서원경(西原京)·서원소경(西原小京) 등 서원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청주라는 이름은 940년(고려 태조 23년)부터 사용되었으며, 2014년 청원군과 통합하며 도농통합시로 출범했다.


  • [청주시 지역 설화] # 고려의 태조 왕건은 과거 청주 지역을 일컬어 “땅이 비옥하고, 호걸이 많다(人多豪傑, 인다호걸)”고 표현했습니다. 완만한 고개에 이를 흐르는 청주의 젖줄, 무심천이 더해져 형성된 비옥한 토지와 풍경은 농업에도 좋았지만, 산천을 바라보며 학업을 열중하는 선비들에게도 각광받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마한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청주 지역에 얽힌 설화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바라본 청주는 대체로 귀엽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면모가 많았지만,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끝까지 항쟁하는 불굴의 투지 또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일부는 DALL-E2를 이용해 생성했습니다.



    홍수를 막기 위해 세운 ‘땅 위의 돛대’


    ● 청주 지역 유일한 국보(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
    ●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 용두사지 철당간의 모습

    청주시의 번화가에 위치해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높이 솟은 철당간은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할 정도로 랜드마크 역할을 해 왔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인 용두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처음 조성된 고려 광종 13년(962년)부터 지금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청주 시민과 함께하고 있다.

    당간은 절의 위치를 알리고, 부처님의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 설치하는 높게 솟은 깃발이다. 당간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철당간, 목당간, 석당간 등으로 분류한다. 역사와 함께하며 세워진 수 많은 사찰만큼이나 많은 당간이 세워졌지만, 세월이 흐르며 대부분은 사라지고 당간을 받치던 지주만 남은 곳이 대부분이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남아있는 당간 중 건립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당간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국보 41호로 거듭났다.

    철당간은 현재 원통 모양의 철통 20대가 쌓여 였지만, 본래는 30대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에 사용하느라 10개를 헐어갔다고 전해진다. 약 60척(대략 18m)에 달하는 철당간의 높이는 당시 청주 시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위용을 자랑했다.

    청주는 예로부터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고, 민요와 풍속의 문명이 동남쪽의 으뜸’이라 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또한 청주에는 하나의 명칭이 또 존재했는데, 바로 주성(舟城)이다. 그리고 이 이름에는 용두사지 철당간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내려온다.

    과거 청주는 토지가 비옥했지만 그만큼 홍수가 자주 발생해 백성의 피해가 심했다. 당시 어떤 점술가 청주의 지형을 보고 “이 고을은 무심천(청주의 젖줄이라 불리는 물줄기) 위에 떠 있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 배에는 돛대가 필요한 법, 이 고을에 돛대가 될 수 있는 높은 기둥을 세우면 평안하리라”라고 전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청주읍성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높은 당간을 세웠다. 그리고 이후에는 홍수로 인한 피해가 나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그때부터 청주는 배 주(舟)자를 써 주성(舟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용두사지 철당간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은 현재까지 잘 보존된 철당간 자체에 기록되어 있다. 당간 아래에서 세 번째 철통의 둘레에 393자 가량의 해서가 양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용두사지 철당간은 청주 호족 김예종이라는 사람이 과거 유행병에 걸렸고, 이를 낫기를 기원하며 사촌형 희일 등과 함께 철통을 주조해 60척 높이의 당간을 세우게 했다고 나와 있다.



    잠자던 용, 무사의 정기를 빼앗아 승천하다


    ● 청주시 용박골 지명 유래
    ●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용암동

    ▲ 청주 용박골 용바위

    청주시 용암동에는 ‘용박골’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이 존재한다. ‘용박’은 용바위를 의미하는 단어로, 마을 안에 용바위가 소재해 있어 원래는 ‘용바위골’이라고 불렸다. 용박골이 소재해 있는 행정구역의 명칭 또한 용암동(龍岩洞)으로, 이 용바위로 인해 생긴 지명이다.

    용박골에 있는 용바위, 그리고 지명에 대한 유래를 알아볼 수 있는 설화가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 청주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에서 영웅이 되기 위해 수련중이던 한 무사의 이야기다. 무사는 여느때처럼 수련을 하고는 잠에 들었는데, 꿈속에서 긴 수염을 가진 도인을 만난다. 도인은 무사에게 “남쪽 땅에 이르러 동쪽 산맥의 정기가 서남 사이로 힘 있게 뻗치다가 멎은 곳에 청벽수실(靑壁水室)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 바윗물로 몸을 씻고 7년 동안 수행하면 날개를 얻고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무사는 도인이 알려준 ‘청벽수실’을 찾기 위해 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남쪽 지역을 샅샅히 헤맨다. 당시 숲이 울창했던 청주 용박골에는 암벽 사이에 자리한 돌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청벽수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년 만에 청벽수실을 찾아낸 돼지를 잡아 하늘에 제를 올리고, 목욕재계를 한 뒤 동굴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동굴 안에는 용 한마리가 자리를 잡고 하늘로 올라갈 때를 엿보며 잠을 자고 있었. 무사는 놀란 마음과 실망감을 안고 동굴에서 뛰쳐나와 분통을 터뜨렸다.

    그날 밤, 무사는 꿈 속에서 다시 도인을 만난다. 도인은 “청벽수실을 용에게 먼저 뺏긴 것은 안타깝지만, 방법이 있다”며 무사를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용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동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용을 죽이면 그의 정기를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사는 도인의 말을 듣고 동굴 밖에서 용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용을 기다린 지 100일이 다 되어가는 새벽, 갑자기 짙은 안개와 함께 마른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더니 곧 폭우가 내렸다. 무사는 천둥 소리에 놀라 그만 정신을 잃었고, 한참 뒤 깨어났을 때는 이미 용이 무지개를 만들며 하늘로 오르는 중이었다.

    결국, 용을 죽이지 못한 무사는 낙담한 채 한탄하며 동굴에 들어갔지만, 애 먼 바위를 발로 차며 화를 풀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한다. 무사가 한탄하며 발로 찬 바위에는 발자국이 남았고, 사람들은 이를 ‘장수발자국’이라 불렀다. 또, 마을에서는 무사가 용물 웅덩이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스님의 통행을 금지한 슬픈 사랑 이야기


    ● 청주시 이정골 설화
    ●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용암1동 이정골고개

    청주시 용암1동에 속해있는 법정동인 용정동에는 ‘구중고개’, 또는 ‘이정골고개’라 부르는 고개가 있다. 먼 옛날 낙가산 보살사(菩薩寺)를 오르내리던 스님들이 산을 넘나들 때 이용한 고개로, 보현스님이 이 고개를 넘어다니는 것을 금지한 이후 ‘구(옛 구,舊)중고개’라고 불리게 됐다. 이 보현스님이 스님들의 통행을 금지한 것과 관련한 설화가 마을에서 전해진다.

    조선 광해군 때, 호조 참판을 지낸 이 참판이 청주로 낙향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운선(雲仙)’이라는 이름을 가진 외동딸이 하나 있었는데, 운선은 집안의 하인인 상백(相百)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양반의 자녀라는 신분과, 하인이라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운선은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고, 결국 상사병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이 참판은 용한 의원은 물론, 무당까지 불러 굿을 하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전국적으로 용한 의원을 수배해도 딸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경기도 용인에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의원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이 참판은 딸의 병세를 상세히 적은 편지를 상백에게 쥐어주며 용인에서 의원을 모셔오게 했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운선은 그 길로 마을 밖에 있는 서낭당에서 상백이 오기를 기다렸다. 용인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난 상백과 만난 운선은 자신의 병이 상백으로 인한 상사병이라 고백하고, 함께 멀리 도망가서 살 것을 권유했다. 고백을 들은 상백은 놀라 ‘저 같은 미천한 놈 때문에 병에 걸리다니’라고 생각하고, 운선의 권유를 거절한 뒤 낙가산 보살사로 도망가 스님이 되기로 한다.

    ▲ 상백이 도망쳐 스님이 된 보살사

    보살사에 도착한 상백은 당시 주지인 보현스님에게 스님이 되게 해 달라 간청했고, 보현스님은 이를 일시적인 고뇌로 여겨 보름동안 손님 방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도 상백의 마음이 바뀌지 않자 직접 머리를 깎아주고, ‘정각’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스님이 된 상백은 보살사에서 수도에 전념했지만, 보현스님과 함께 시주를 따라 나선 어느날 청주 고을에서 운선과 마주치게 된다.

    운선은 자신이 연모하던 상백이 스님이 된 것을 보고 밤중에 보살사에 찾아가 다시 한 번 함께 도망치자고 권유한다. 상백은 또 다시 거절했지만, 운선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몰래 보살사를 빠져나온 둘은 청주 고을로 향하던 중 ‘이정골고개’에서 잠시 한 숨을 돌린다.

    상백은 다시는 속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넘었던 그 고개에서, 불과 석 달이 채 되지 않아 속세로 향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운선에게 “떳떳하게 살지 못 할 바에는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상백과의 신분 격차로 인해 어디서든 떳떳하게 살지 못 할 것이라 여긴 운선 또한 그를 따르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주민들은 스님이 넘나들던 고개에서 목을 매고 죽은 한 스님과 젊은 여인의 시체를 발견해 청주 관아에 고했다. 보현 스님은 스님이 젊은 처녀와 함께 목매어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후 보현 스님은 이정골고개로 스님이 넘나드는 것을 금지했고, 그렇게 해당 장소는 ‘구중고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이정골고개(구중고개)로 추정되는 언덕에서 바라본 이정골 마을


    백성을 두 번이나 지킨 부모와 같은 산


    ● 청주 부모산성 전설
    ●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산10-1외

    청주 서쪽에 위치한 부모산은 청주시의 서쪽 가운데 가장 높아 눈에 확 들어오는 산이다. 청주시 비하동과 지동동의 경계를 이루며, 경부고속도로의 청주나들목(I.C.)과 중부고속도로의 서청주 나들목 사이에 있는 231.7m 높이의 산으로, 본래는 아양산, 악양산, 아미산 등으로 불렸다.

    이 산이 ‘부모산’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몽고가 고려를 침략했던 시기의 일로, 청주의 주민들은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늘 안개가 자욱했던 부모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들어가 피신했다. 안개에 덮인 부모산은 주민들을 잘 숨겨주었고, 그렇게 노략질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전한다.

    또한, 산성 안으로 피신한 주민과 말들은 물이 떨어져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그 때 갑자기 성 안에서 샘물이 솟아났는데, 이에 주민들은 산의 은혜가 부모와 같다 하여 ‘부모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다.

    두 번째 전설은 임진왜란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빼앗은 화천당(花遷堂) 박춘무(朴春茂)[1544~1611]는 그 여세를 몰아 아양산을 탈환하고,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번번이 박춘무에게 패했던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박춘무가 아양산에 머무는 것을 보고 산을 포위한 뒤 식량 보급을 차단했다.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안 구로다 나가마사는 포위를 더욱 굳혀 식량은 물론 물 한 방울 보급되는 것을 완전히 차단했다고 전한다.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은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과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 지나던 때부터는 아사자가 속출했고, 박춘무 자신 또한 기력을 다해 산기슭에 있던 큰 소나무 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지는 찰나,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이 박춘무의 눈 앞에 나타났다. 노인은 박춘무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한 편,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깜짝 놀라 일어난 박춘무는 병사들을 시켜 소나무를 뽑게 했는데, 소나무가 다 뽑히기도 전에 엄청난 양의 물이 솟아났다. 목을 축이고 용기를 얻은 의병들은 다시 거센 항전을 이어갔으며, 이들에게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왜병들은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빠져나갔다고 전한다.

    왜병이 물러난 이후, 박춘무는 목타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물을 내린 아양산을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어버이의 은혜에 빗대며 감사했고, 재단을 쌓아 산신에게 제를 지냈다. 이후 아양산을 부모산으로 부르고, 소나무를 뽑자 물이 솟아오른 자리를 ‘모유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생원의 딸부터 임금의 눈병까지 고친 청주의 ‘약수’


    ● 청주시 명암약수, 초정약 설화
    ●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위치한 ‘명암약수’는 1920년 무렵 발견된 탄산약수로 철분 성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접근성이 좋아 청주 시민들이 많이 이용했다. 비록 발견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이전부터 명암약수는 청주에 살던 박생원의 딸을 치료해 줬다는 설화가 함께 전승되고 있다.

    옛 청주 남들(현 수곡동)에는 박생원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딸을 대머리(현 방서동)에 위치한 한 서방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을 잘 하던 도중 박생원의 딸이 병에 걸렸고, 좋다는 약과 용한 의원을 불러 치료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박생원의 딸은 남편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지내다가 죽게 해 달라며 마지막 부탁을 청했고, 그렇게 박생원의 딸은 다시 친정에 돌아왔다. 박생원 부부는 지극히 딸을 간호했지만 병환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천수사’의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스님은 박생원의 집안을 살펴보더니 “따님의 병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백일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안정을 취할 곳으로는 범밭골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명암약수가 자리한 곳의 지명은 과거 ‘범밭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울창한 숲으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던 곳이었다. 이를 들은 박생원은 호랑이가 들끓는 곳에 딸을 백일 동안 놔 두는 것은 호랑이 먹이로 주라는 것 아니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박생원은 또 ‘딸은 이미 죽은 목숨이니, 최후의 방법을 써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범밭골에 움막을 짓고 한 달간 먹을 양식과 함께 딸을 머무르게 했다. 한 달이 지난 후, 박생원은 딸 아이의 시체라도 묻어주고자 움막을 찾았다. 그러나 이게 웬 걸, 딸이 건강하게 잘 살아있는 게 아닌가. 박생원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딸은 “물을 찾아다니다 바위 틈에 흘러나온 물을 마시기도 하고, 밥을 지어 먹기도 했는데, 점차 몸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박생원 또한 딸이 마셨다는 물을 마셔보더니, “이는 하늘에서 주신 신령한 약수가 틀림없다”며 기뻐했다. 이 이후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도 약수의 효험을 보기 위해 범밭골을 찾았다고 전한다.

    ▲ 현재는 통행이 금지된 명암약수터

    명암약수 외에도, 청주에는 유명한 약수에 대한 이야기가 내려오는 편이다. 명암 약수보다도 더 유명한 초정 약수 또한 청주의 유명한 전설이다. 특히 눈병을 심하게 앓던 세종대왕의 눈을 치료했다는 것을 계기로 그 효능이 널리 알려졌다.

    초정 약수는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에 위치한 약수로,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라고 불렸다. 천연 탄산수로 옛 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을 만큼 효능이 좋은 유명한 약수다. 세종대왕 또한 이 소문을 듣고 두 차례나 청주에 행차했다고 전한다.

    때는 세종이 한글 창제게 한창 몰두할 조선 전기로, 밤낮 없는 격무로 인해 눈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시야가 흐려지는 일이 많았다. 그 무렵 청주의 초수(초정 약수)가 눈병에 효험이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된 세종은 곧 청주에 행궁을 짓는 작업에 착수했다.

    행궁이 완성된 이후, 청주에 도착한 세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병의 치료를 시작했으며, 초정 약수를 마셔도 보고, 대야에 눈을 담아보기도 하고, 또 초정 약수를 가득 담은 탕에서 목용을 하기도 하며 눈병 치료에 열중했다. 이를 며칠 반복하자 눈이 한결 편안해진 세종은 흐뭇해하며, 행궁에서 생활하던 중 백성의 삶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다고 전한다. 왕의 행차로 백성이 가뜩이나 더 힘들지 않을까 여기며 음식과 곡물을 하사했고, 행궁에 함께 자리한 집현전 학자인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한글을 보완하는 작업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후 한양에 돌아간 세종은 얼마 뒤 다시 초정에 방문해 비슷한 생활을 하다가 궁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인물


    ● 충렬공 송상현 (본관은 여산, 1551 ~ 1592)
    ● 지역: 청주 충렬사

    ▲ 청주에 위치한 송상현 충렬사의 모습

    송상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관으로, 전쟁 초기 전쟁 초기 부산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에 맞서 동래성 전투로 성을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선조 28년(1595년) 동래에 있던 묘소를 청주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년)에 사당을 창건했다.

    송상현의 호는 천곡(泉谷), 시호는 충렬로, 선조9년(1576년) 문과 급제 후 선조 24년(1591년) 동래부사에 올랐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 군이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다다랐을 때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전즉전의 부전즉가도) –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라’라는 글을 적어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본 송상현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戰死易(전사이) 假道難(가도난) – 싸워서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왜군과 맞서 끝까지 항전할 것임을 천명한 위 문구는 나라를 지키려는 송상현의 절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동래성 전투는 처음에는 조선군이 유리한 듯 보였으나, 전열을 재정비한 일본군이 동래성의 약점인 동문을 공격하며 결국 성이 함락되는 것으로 끝났다. 송상현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네 번의 절을 한 뒤 항전하다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비록 적수이긴 하나 송상현의 절개와 용기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뒤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고 추모비를 세웠다.

    청주 흥덕구에 위치한 송상현 충렬사는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시내에서 빠져나와 청주나들목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죽기 전 부친에게 남긴 글 중 하나인 ‘군신의 의가 중하니, 부모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고 적힌 비석 등을 통해 그의 충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 의병장 박춘무 (본관은 순천, 1544 ~ 1611)
    ● 지역: 청주시 중앙공원

    ▲ 중앙공원에서 볼 수 있는 전장기적비

    박춘무는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수복을 이끌었던 의병장이자 문신이다. 청주성 수복은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로, 박춘무는 조헌 등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했다. 침술이 뛰어나 의관으로도 활약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임천군수, 인천부사를 역임하고, 이듬해는 부평부사를 지낸 바 있다.

    박춘무는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의 아우, 인년의 8세 손이던 기정의 넷째 아들이다. ‘토정비결’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에게서 수학했는데, 함께 청주를 지킨 것으로 널리 알려진 조헌 또한 박춘무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이다.

    임진왜란 당시,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일본군의 일부를 청주성에 주둔시켜 충청도 지역을 장악하게 했는데, 청주성 탈환 작정은 임진왜란이 시작한 때로부터 약 3개월 뒤인 7월 하순에 시작되었다. 4월부터 격문을 지어 의병을 모집한 박춘무는 7월에 아들 동명과 아우 춘번을 앞세워 의병을 일으켰고, 공주에서 일어난 조헌과 승장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이 만나 8월 1일 의병, 승병, 관군 3,600여 명이 청주성을 공격했다.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였으며, 이후 희망을 얻은 조선 백성들이 방방곡곡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주성 탈환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장기적비는 청주의 번화가에 위치한 청주 중앙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청주시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용두사지 철당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 청주를 대표하는 여덟 명의 어진 선비, 낭성팔현(琅城八賢)
    ● 지역: 청주 신항서원

    ▲ 청주 신항서원의 모습

    한편, 청주는 예로부터 학문과 선비의 고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에 새겨진 글귀에서도 ‘학원경’, ‘학원낭중’ 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과거부터 지방 교육의 핵심 지역으로 여겨진 것을 확인 가능하다.

    낭성팔현(琅城八賢)은 청주를 대표하는 여덟 명의 선비를 일컫는 말로, 행정지역상 청원 낭성에 국한된 인물들을 엮는 것이 아니라 청주 일대의 사림을 지칭한다. 조강(趙綱)의 문집인 모계집(慕溪集)에서 이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해당 문집은 조강의 13세 손이 1904년 간행했다. 모계집이 언급한 낭성 팔현은 박훈(朴薰,1484~1540), 한충(韓忠 1486~1521), 송인수(宋麟壽1499~1547), 조강(趙綱 1527~1599), 정사호(鄭賜湖 1553~1616), 이득윤(李得胤:1553~1630), 이덕수(李德洙:1577~1645), 홍석기(洪錫箕 1606~1680)를 일컫는다.

    낭성팔현의 하나인 조강은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인 선조 3년(1570년) 이득윤, 변경수 등과 함께 유정서원(有定書院)을 창건했고, 해당 서원은 현종 1년(1660)년 사액(임금이 사당이나 서원에 이름을 하사하던 일)되며 신항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신항서원은 16세기 청주사림의 형성 과정에서 낭성팔현이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나타내는 단서다.

    현재 신항서원에는 이색·경연·박훈·김정·송인수·한충·송상현·이득윤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3월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중고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신항서원에서는 신항서원활성화사업단의 운영 아래 마을 주민들에 대한 교육 활동 또한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아이템


    ● 직지심체요절 – 전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 소재지: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

    ▲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재한 직지심체요절(사진 프랑스국립도서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간핸된 책으로, 진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줄여서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상/하 2권으로 구성된 책이며,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은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하고 있다.

    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구문에서 비롯됐다.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직지의 간행 장소인 청주 흥덕사는 1985년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어, 오늘날 청주 흥덕구 운천동 866번지에 위치했음이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1986년에는 ‘청주 흥덕사지 학술회의’를 통해 흥덕사가 학계의 인정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흥덕사터 정비와 함께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개관했다.

    ● 청주 사뇌사 광배
    ● 소재지: 국립청주박물관

    1993년 청주시 사직동 무심천 인근에서는 고려시대의 금속공예품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사뇌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청동 금고를 포함, 480여 점에 달하는 불교 관련 금속 공예품은 당시 학계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다.

    대부분 절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 한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것을 미루어 보아, 학계에서는 어떤 절박한 사태를 맞아 사용하던 물건들을 급히 묻은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일부 공양구나 그릇 등에서는 ‘청주 사내사’, 또는 청주 사뇌사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데, 연대 순으로 특정 시점에서 사내사가 사뇌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한다. 400여 점이 넘는 금속 공예품의 규모로 보았을 때, 당시 사뇌사는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립청주박물관은 2013년부터 지역문화재를 중심으로 국내 금속공예품에 대한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박물관 내에 전시하고 있다. 사뇌사에서 출토된 대형 투각(재료의 면을 도려내거나 깎아서 원하는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 광배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장식물이다.

    ●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
    ● 소재지: 청주시 보살사

    양반의 딸과 하인의 러브 스토리에 등장한 청주의 보살사는 설화 외에도 다양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석조이불병립상이 그 예로, 커다란 판석에 두 불상이 나란히 도을새김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광배에 두 개의 불상을 새긴 일광이불상(一光二佛像)이며, 불상의 아담한 크기와 양식은 귀여운 느낌을 준다.

    문화재청은 탄력이 줄어든 단아한 묘사와 간략한 기법 등을 통해 고려시대의 석조병존불입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병존불입상은 석가불과 다보불의 병존불좌상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주목된다고 전했다.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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