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닐(Terra Nil) 리뷰

롤러코스터 타이쿤 시리즈나 시티즈 스카이라인 시리즈로 대표되는 여러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들은 텅 비어 있던 공간을 나만의 색으로 꽉 채우는 과정에서 게이머에게 기쁨과 성취감을 제공합니다. 길이나 수도 시설 같은 가장 기본이 되는 구조물을 하나씩 차곡차곡 배치하고, 나중엔 자신이 계획한대로 정교하게 맞물리고 기능하는 여러 장치들과 건물들을 보고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빈틈 없이 정교하게 채워지는 공간들을 보고 있자면, 가끔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복잡하게 들어찬 건물이나 구조물들을 싹 다 밀어버리고,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리고 싶은 그런 순간 말이죠. 만약 지금 여러분이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 게임이 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꽉 채웠을 때가 아닌, ‘전부 비웠을 때’ 비로소 클리어할 수 있는 게임이거든요.


게임명: 테라 닐 (Terra Nil)

장르명: 친환경 퍼즐 시뮬레이션

출시일: 2023.03.29

리뷰판: 리뷰용 빌드

개발사: Free Lives

서비스: 디볼버 디지털

플랫폼: PC, 넷플릭스

플레이: PC


천리길도 테라포밍부터,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를 자연 환경 가득한 푸르른 행성으로!

▲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 지 막막해지는 황무지가 게임의 기본 배경입니다

테라 닐에서 플레이어는 동식물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폐허에서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 자연환경을 되돌리는 일을 맡게 됩니다. 전기를 만들어 미래 과학 기술이 집약된 최첨단 시설들을 설치하고, 오염된 땅을 개척하거나 풀을 심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식생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능한 적은 재화를 사용하면서 더 넓은 구역에, 더 높은 효율을 뽑아낼 수 있도록 건물들을 세워나가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거든요. 사용할 수 있는 자원과 땅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게이머들은 남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며 머리를 짜내기 마련입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미래형 과학 기술을 보는 재미가 또 쏠쏠합니다. 암석 위에 설치하기만 하면 몇개 시설이 작동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전기를 어떠한 오염 배출 없이 생산해내는 풍력 발전기 터빈부터, 전기만 있으면 땅과 바다의 오염 물질들을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독소 정화기, 개척된 토지 위에 배치하면 넓은 범위에 녹지를 만들어주는 관수기까지, 지금 당장 존재한다면 그 어떤 척박한 환경이라도 금세 동식물이 뛰어다니는 환경으로 테라포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기술들이죠. 스테이지를 거듭할 때마다 각기 다른 환경에 맞는 서로 다른 기술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쉽게 질려버릴 걱정도 없습니다.

▲ 용암 위에 설치하면 전기를 만들어내는 발전기 등, 다양한 미래 기술이 등장합니다

▲ 인게임 가이드북을 통해 각 구조물들의 대략적인 구조와 소개문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았던 척박한 대지에 풀과 나무, 이끼를 가득 채워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나면, 이제는 이곳에서 살아갈 다양한 동물들을 발견할 차례입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복원한 초원, 숲, 갈대밭, 습지, 산호 구역, 설원, 모래사장 등 여러 식생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동물들이 서식할 수 있고, 해당 환경을 완벽히 꾸미면 비로소 해당 동물을 만나볼 수 있게 되는 식입니다.

조건이 딱 한 개라도 결핍하면 동물들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테라포밍을 위해 제공된 여러 시설과 기구를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최적의 환경을 구성하는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각 동물의 특성을 소개하는 짧은 소개문을 참고삼아 숨겨진 조건들을 찾고, 하나씩 그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이 마치 20문답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은 재미를 선사합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복원한 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갈 20종 이상의 각기 다른 동물들을 모두 찾아내면, 클리어 후에 ‘여태까지의 게임 플레이가 헛되지 않았구나’하는 일종의 성취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 도감 속 미발견 동물들의 생태계를 복원하고, 비어있는 공간을 하나씩 채우는 재미도 각별합니다

▲ 동물별 서식 환경을 제대로 갖춘 뒤 스캔하면, 자연으로 돌아온 동물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라 닐이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들과 다른 부분은 바로 이 다음부터 등장합니다. 바로 지금껏 쌓아올린 여러 테라포밍 장비들을 모두 치우고, 복원된 자연환경과 동물들만 놔둔 채 지역을 떠나는 것이죠. 어떠한 대가 없이 나쁜 악당을 모두 쓰러트린 뒤,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홀연히 석양을 향해 걸어가는 영웅처럼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손을 거친 모든 건설 장비들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수거해야 합니다. 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배치했던 발전 시설이나 한 때 토지를 비옥하게 가꿔줬던 정화기와 관수기, 동물들의 보금자리를 찾아주고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배치했던 연구시설, 심지어 장비 수거를 위해 설치했던 모노레일이나 드론 같은 수거 기구까지 예외는 없습니다.

숲 속의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자투리 장비들까지 알뜰하게 모두 챙기면, 드디어 모든 임무를 마치고 이륙할 수 있게 됩니다. 남은 것은 비행선이 행성의 대기권을 벗어나기 전에 내가 복원한 지역을 돌아보며, 기념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것뿐입니다. 그 어떤 작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말이죠.

▲ 테라포밍 과정에서 정말 다양한 장비를 복합적으로 활용합니다. 맵 구석구석이 각각의 장비로 도배가 될 정도죠.

▲ 마지막엔 모든 것을 회수하고, 머문 자리엔 오직 자연만 남겨둡니다

▲ 복원이 끝나 푸른 빛으로 가득한 지역을 돌아보는 것은 꽤 감동적입니다

테라 닐은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들에 대한 ‘비틀기’를 기본 전제로 기획된 게임입니다. 개발자는 플레이어가 게임 속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자연환경을 바라보며 치유의 시간을 갖기를 바랐으며, 이를 위해 캐릭터나 스토리, 인물 표현을 일절 배제한 자연 중심의 게임으로 꾸며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게임에서는 인물들의 상관관계나 스토리를 파악하기 위해 화면 속 지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정독하거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치 스도쿠나 노노그램을 플레이하듯 정해진 규칙을 기억하며 하나씩 단계를 밟아나가기만 하면 되죠. 마음을 비워내고 평안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이 작품을 권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거, 너무 무턱대고 비우기만 했나?”


테라 닐은 각기 다른 환경의 네 개의 대륙을 모두 복구하면 엔딩을 볼 수 있는 짧은 구성으로 이뤄진 게임입니다. 엔딩 롤을 볼 때 까지 길어도 다섯 시간이면 충분하죠. 물론 엔딩 이후에도 2회차 구성으로 새로운 지역들을 복구할 수 있게 되지만, 사실 추가되는 동물이나 시설 콘텐츠가 없으므로, 그냥 게임을 끝내기 아쉬운 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반복 콘텐츠 수준에 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발사인 Free Lives 에서도 이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무한하게 다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대신, 이러한 디자인과 방식의 게임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개발사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나 도전 정신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시뮬레이션이나 퍼즐 장르의 게임을 깊이 있게 즐기고 싶었던 유저들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보통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장르를 표방하는 게임들은 주어진 공간을 자유롭게 꾸미는 샌드박스 기능으로 몇 백 시간 이상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넉넉한 볼륨을 하나의 장르적 특징처럼 내세우곤 했거든요. 기존의 경영,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들에 대한 비틀기가 게임의 주된 테마였다고는 하지만, 해당 장르의 핵심 재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뒤틀어버린 결정은 다소 아쉽게만 느껴집니다.

▲ 이것저것 꽤 다양한 개간 방식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일회성에 그치는 편입니다

▲ 숨겨진 동물을 찾거나 추가 목표에 도전할 수 있지만, 이를 전부 즐겨도 5시간이면 엔딩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 볼륨이 적더라도 이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콘텐츠가 계속 맛보고 싶어질 정도로 알차다면, 그 아무리 작고 부족한 볼륨이라도 얼마든지 다시 반복해서 플레이하게 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테라 닐 속 콘텐츠는 이러한 깊이 있는 매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가장 단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동물들의 표현 방식입니다. 동물은 사람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 게임 특성상 이 게임의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게임 가이드북을 통해 각 동물의 생태를 설명하는 페이지가 따로 존재할 정도로, 테라 닐에서 동물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콘텐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공들여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이유도 플레이어가 자리를 떠난 후 동물들이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게임에서 동물을 그리는 방식은 절대 주연 배우를 대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열심히 서식지 조건을 추리해서 환경까지 갖추고, 겨우겨우 동물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냥 3D 모델링으로 대충 그려진 동물 모습을 보는 것이 끝이거든요.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화면을 확대해서 동물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해보지만, 조금 걷거나 수영하는 것 외에 별다른 상호작용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새로운 맵을 시작할 때마다 계속 반복되다 보니, 나중엔 그저 ‘일회성 퍼즐 풀이’ 정도의 감흥만 남게 됐습니다.

▲ 삭막했던 땅에 눈이 내리고,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게 되는 기후 표현은 감동적이었으나,

▲ 동물 표현에서 별다른 상호작용이 없으니 딱딱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동물의 생태 같은 것을 지켜보지 않더라도 게임 자체는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게임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퍼즐과 시뮬레이션이 조화된 테라 닐 속 환경 복원 과정이 자신의 취향에 맞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2회차를 즐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더 높은 난이도의 게임 플레이를 기대하는 이들을 위한 난이도 선택 옵션이 제공되고 있거든요.

대부분의 건물을 비용 걱정 없이 마음대로 지어보며 여러 환경 요소를 시험해볼 수 있는 ‘정원사’, 일반적인 게임 속 노멀 모드에 해당하는 ‘생태학자’, 그리고 건설 하나하나에 신중해야 하는 ‘환경 엔지니어’까지 세 가지 난이도 옵션이 제공되므로, 2회차에서는 1회차 때 플레이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테라포밍에 도전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대 10시간의 플레이 타임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동물 보호를 목표로 삼고 있는 게임에서 동물의 생태 관찰에 심취할 수 없는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어찌저찌해도 게임으로서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셈입니다. 게임에 담긴 공익성만 잔뜩 광고하고 막상 게임을 까보면 기본적인 것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반쪽자리 게임들이 가득한 상황에서, 테라 닐의 완성도는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수준입니다.

▲ 전체 볼륨은 다소 아쉽게 느껴졌지만, 1회차까지의 구성과 연출은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 2회차 개념의 추가 지역까지 클리어하면, 100% 복구를 볼 수 있게 됩니다





테라 닐의 개발사 Free Lives는 폭발과 액션이 난무하는 슈팅 게임 브로포스(Broforce), 사지를 뜯어내는 가학적인 액션이 돋보이는 VR 고어 액션 게임 ‘곤(GORN)’,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는 남성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캐주얼 게임인 ‘제니탈 자우스팅(Genital Jousting)’을 만든 개발사로 유명합니다. 잔혹하고 폭력적이거나, 과격한 표현들이 돋보였던 기존의 스타일을 기대했던 유저들은, 기존의 작품들과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의 게임인 테라 닐에 적응하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한한 성장 대신 자연스러운 조화를 추구하는 부드럽고 친근한 분위기, 계획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더라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벼운 게임 템포, 심신의 안정을 찾아주는 부드러운 사운드 트랙은 개발사 Free Lives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방향성과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참, 개발사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기존의 게임 스타일과 방향성이 테라 닐 이후에 완전히 끊어질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존에 이들이 보여주었던 폭력성 짙은 플레이 스타일은 신작 액션 게임 ‘앵거 풋(Anger Foot)’으로 이어져 순조롭게 개발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개발사 Free Lives는 테라 닐의 스팀 판매 수익금 일부를 멸종 위기 동물 보호를 위해 동물보호단체 ‘EWT’에 기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개발 초기부터 게임이 현실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고민했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부를 계획했다는 것입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현실 세계의 생태계 보존에 일조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게임이라는 매체를 활용한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게임이 될 수 있겠네요.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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