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게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온 게이머라면, ‘커피톡(Coffee Talk)’이나 ‘드레드아웃(Dreadout’)과 같은 게임들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두 게임은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인디 게임 개발자들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커피 톡의 성공적인 글로벌 성과 이후, 두 번째 작품을 발매 준비중인 인도네시아의 인디 게임 개발사 Toge Productions이 이번에는 또 다른 인도네시아 개발사 Mojiken과 힘을 합쳐 신작 ‘A Space for the Unbound(묶이지 않은 자들을 위한 우주)’를 출시했습니다. 90년대 인도네시아의 정취를 담은 해당 게임은 예상치 못한 전개와 흥미로운 반전 등으로 무장한,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매력을 지닌 청춘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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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한 여름 풍경, 생소한 마을의 분위기를 잘 담아낸 픽셀 그래픽
키 비주얼에서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지만, 이 게임의 매력은 상당히 감성적으로, 그리고 디테일하게 그려진 픽셀 그래픽입니다. 대만의 장기인 청춘 영화, 드라마가 연상될 만큼 여름의 청량한 느낌을 잘 표현해낸 한 편, 차가운 톤과 따뜻한 톤이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게임을 즐기는 내내 눈에 즐거움을 줍니다.
우리나라의 90년대 풍경조차 생소한 이들이 많을 시기인 만큼, 인도네시아의 90년대 정취를 담은 게임은 외국인이 바라본 시점에서는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 근래 영화 ‘랑종’이나, 넷플릭스 시리즈 ‘그녀의 이름은 난노’ 등의 글로벌 흥행을 통해 태국의 정취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만큼, 이와 게임의 풍경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는 편입니다.
또한, 게임 초반 ‘A Space for the Unbound’는 인도네시아의 이모저모를 게이머에게 알려주는 친절한 홍보대사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주인공과 여자친구 ‘라야’의 버킷리스트를 달성해 나가다 보면 위처럼 퀴즈를 내는 3인방을 만나게 되는데, 인도네시아와 관련한 퀴즈를 통해 그 나라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상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도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그 외에도 게임은 인도네시아의 근대 음악 종류 중 하나인 ‘크론총(Kron cong)’이라든지, ‘른당’이나 ‘박소’, ‘소토’ 등 현지에서 친숙한 음식들을 기회가 되는 대로 언급합니다. 이러한 형태로 게임의 무대가 되는, 그리고 아마도 개발자들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죠. 인도네시아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자연스러운 접근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꽤나 효과적이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게임을 플레이하기 이전보다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대한 흥미가 늘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낯설지만 흥미로운 전개, 급격히 무거워지는 메인 스토리
‘이 게임은 모든 청중에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우울과 불안, 자살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막연히 고등학생들의 재기발랄한 청춘물을 생각하고 게임을 시작했다면, 이 화면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게임은 이 경고 문구 그대로, 초반의 청춘 스토리 이후 급격한 내용 전개가 이뤄집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게임은 플레이어가 역할을 맡는 주인공 ‘아트마’와 그의 여자친구 ‘라야’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이들은 함께 진로 계획서를 작성하는 대신 뒷장에 버킷리스트를 함께 적고, 이를 완수하기 위한 여정에 나서죠. 여기서 적는 버킷리스트가 모두 게임에서 실제로 완수할 수 있는 도전 과제라는 점도 은근히 인상에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홍빛 청춘 드라마 속에서도 위화감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아트마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여자친구 ‘라야’를 문득 몰라본다거나, 길거리에 만나는 반 친구들이 아트마를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는 묘한 장면이 슬쩍 지나가는 식이죠. ‘청춘’에 방점이 찍힌 초반 챕터에서는 무심결에 지나가는 내용이지만, 이런 ‘은근슬쩍’ 스타일의 위화감은 게임의 전개가 이뤄지는 동안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흥미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게임플레이 요소 측면에서는 주인공이 가진 신비로운 ‘초능력’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어갑니다. 주인공 ‘아트마’는 우연히 얻게 된 빨간 책을 통해 상대의 마음(또는 기억)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심층 다이브’라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화 ‘인셉션’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상대방의 마음 속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고쳐(?) 현실에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주인공 아트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불안이나 무의식 속의 공포, 과거의 트라우마를 엿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치유하기 위한 과정이 반복되며 그가 가진 ‘심층 다이브’ 능력을 점점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죠.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의 마음과 꿈을 바꾸는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모습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초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주인공 뿐만이 아니었으니, 아트마의 여자친구 ‘라야’ 또한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아트마 앞에서 숨기고 있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입니다. 아트마는 이런 라야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짐과 동시에,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모습을 숨기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위해 분주히 로카 시(게임의 배경인 인도네시아의 가상의 마을) 를 뛰어다니게 되죠.
이렇게 주인공 아트마가 자신의 여자친구 ‘라야’가 가진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는 순간부터, 초반에 푸릇푸릇한 분위기를 선사했던 게임은 급격한 변화를 맞습니다. 새파란 여름 하늘에 일어난 균열은 점점 그 크기를 더해가고, 몇몇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트라우마에 잠식되어 기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게임의 소개 문구에서도 알려주는 ‘세상의 멸망’의 곧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이야기는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플레이어에게 몰입을 선사합니다.
다소 흔한, 민감한 소재를 독특한 이야기로 풀어내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전체적인 스토리 중 일부만 언급했으나, 게임은 점차 후반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학교와 가정 내 폭력과 같은 민감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도네시아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이웃 나라인 태국에서는 ‘더 글로리 챌린지’ 등이 이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현지에서 상당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됨과 동시에 국내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학교폭력’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꽤나 자극적이지만, 너무나 많은 매체에서 사용해 왔기에 자칫 예측가능한 이야기를 선사하는 쪽으로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A Space for the Unbound’는 사람들의 심층에 다가서는 초능력, 시공간의 균열을 이용한 탐색을 통한 흥미로운 게임플레이는 물론, 여주인공 ‘라야’의 비밀을 차례로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다가갑니다.
다만 초반의 청춘 드라마에서 후반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그 과정에서 너무나 소일거리처럼 느껴질 수 있는 미션이 배치돼 있어 자칫 이야기의 몰입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스토리 전개 또한 텍스트를 무심코 넘기다 보면 헷갈릴 가능성도 있고요. 이러한 점들만 감안하여 즐긴다면, 엔딩에 다다르는 시점에서는 오랜만에 남는 여운을 느끼기 충분한 타이틀입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인디 게임산업은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생소한 세상일 수 있는 인도네시아, 그것도 90년대의 정취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선에서 표현한 점에 대해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스토리가 중심인 게임인 만큼 게임플레이 매커니즘이 크게 강조되지는 않지만, QTE를 통한 상황별 상호작용이나, 초능력을 이용한 퍼즐과 탐험 등의 난도 또한 적당한 수준입니다.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잔잔한, 하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이야기가 궁금한 분이라면 ‘묶이지 않은 자들을 위한 우주’는 게임 라이브러리에 하나 더할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출처: 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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